이양승
이양승

한국은 갓 쓰고 스포츠카 타는 나라다. 의식이 기술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발생하는 사회적 부적응 문제다.

2025년 노벨경제학상은 조엘 모키르(Joel Mokyr), 필리프 아기옹(Philippe Aghion), 피터 하위트(Peter Howitt)에게 돌아갔다. 세 연구자는 기술 혁신과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경제 성장의 근본 동력임을 체계적으로 밝혀왔다. 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혁신이 뿌리내릴 수 있는 제도적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한국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한국의 제도는 혁신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일까? 혁신의 주체는 기업이다. 정부나 의회도 아니고, 정치인도 관료도 아니다. 그들은 혁신의 대상이다. 혁신은 R&D(연구개발)로부터 온다. 사람만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게 아니다. 기업들도 달리기 시합을 한다. 바로 R&D 레이스다. 산업생태계는 월드컵 조별리그가 아니다. 조 추첨을 통해 본선 진출 요행을 기대할 수 없다. 관건은 신지식과 그 배타적 권리다.

한국의 R&D는 D학점이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신뢰가 없어서다.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객관식과 단답형에 특화되어 있다. 지식 창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잦은 제도 변경과 반기업적 환경 탓에 과감한 투자를 주저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정책 방향이 뒤집히고, 국회는 편가르기에만 골몰한다. 한국의 제도 개혁은 대개 쓰레기를 많이 버리니 쓰레기통을 없애는 식이다. 정치 불안과 정책 비일관성이 기업들의 혁신 의욕을 꺾는 구조인 것이다.

아기옹과 하위트의 성장모형은 새로운 게 낡은 걸 대체하는 과정, 즉 창조적 파괴와 기술진보를 강조한다. 모키르는 혁신이 활발했던 나라들의 공통점을 지식 축적·개방성·사회적 신뢰라고 지목했다.

한국은 어떨까? 정치적 편향성, 관료적 폐쇄성, 그리고 그 둘을 잇는 ‘끼리끼리’ 연고주의가 바로 한국 제도의 본질이다. 같은 편은 무조건적 신뢰, 다른 편은 무조건적 배척이다. 패거리주의를 위해 필요한 건 지식보다 ‘싸가지’다. 그러니 창조적 파괴는 언감생심, R&D는 사치일 수밖에 없다.

핵심은 유연성과 개방성이다. 제도는 정치인 관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간을 위한 것이다. 한국 경제의 외양은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고 하지만, 제도는 ‘1차 지역예선’ 통과도 어려워 보인다. 법과 규제는 경직적이고, 계약의 불완전성과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 정책은 중장기적 전략보다 단기적 성과에 치중되며, 연구는 질보다 양을 더 따진다. 정치권은 진영에 따라 분열되어 있고, 산업정책은 정쟁의 불쏘시개가 되기 일쑤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우왕좌왕할 뿐이다.

혁신을 이끌어야 할 제도적 기반이 오히려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셈이다. 특히 스타트업이나 신산업 분야는 기존 제도의 벽을 넘지 못해 성장 기회를 잃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제도 자체가 창조적 파괴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한국 정치는 구한말처럼 한국을 또다시 혁신 경쟁의 낙오자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규제 완화와 산업정책이 정치논리에 휘둘리지 않도록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이번 노벨경제학상은 한국에 분명한 교훈을 준다. 혁신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혁신은 R&D에서 시작되지만, 그 성공 여부는 제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가 우선시되는 나라에서 혁신은 꽃필 수 없다. 혁신의 동력은 개방적인 태도, 공정한 경쟁, 고신뢰 사회문화다. 한국의 재도약을 위해선 먼저 제도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창조적 파괴는 한국의 정치권과 관료조직에 더 필요할 수도 있다. 그게 2025년 노벨경제학상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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