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투자금 3500억 달러에 관한 트럼프 대통령의 ‘선불’ 발언을 놓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조롱과 함께 여권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무도한 관세협상으로 국민주권을 훼손하는 미국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미국이 안보동맹국이자 경제동맹국인 한국을 마치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단일대오로 한국 국민의 경제주권을 지켜내는 데 앞장서겠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기나 할까? 지금 한국 경제는 벼랑 끝에 섰다. 그 지표가 바로 환율 상승이다. 모두들 잘못 짚고 있다. 환율 결정에 있어 가장 큰 요인은 ‘기대의 자기 실현성’과 ‘정치적 불확실성’이다. 모두가 같은 기대를 하면 그 기대는 실현된다. 호황도 불황도 별게 아니다. 호황이란 모두가 경제 상황을 낙관하는 내쉬균형(Nash Equilibrium:상대방의 전략에 대한 최선 대응을 하고 있는 상황)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상태이고, 불황은 모두가 경제 상황을 비관하는 내쉬균형 상태인 것이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자국의 통화가치가 떨어지는 건 대내외 경제주체들이 그 가치가 떨어질 거라 비슷한 기대를 하기에 결국 그 기대가 실현, 비로소 가치 하락이 나타나는 것이다. 머지않아 그 나라 통화 가치의 폭락을 기대하게 하는 건 바로 정치적 불확실성이다.
사람들은 ‘자산’하면 부동산 주식 등을 쉽게 떠올리지만 실은 통화도 자산이 될 수 있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그 나라의 통화를 순식간에 위험자산으로 만들어 약세 압력을 받게 한다. 그럴수록 달러 같은 안전자산 통화는 강세를 띠게 된다. 환율 상승의 이유인 것이다.
사례가 있다. 터키 리라화 위기도 정치에서 비롯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고금리에 반대해 중앙은행을 압박하는 비정상적 정책을 펼친 바 있다. 터키에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결과, 2018년 한 해 동안 리라는 달러 대비 40% 이상 가치가 폭락했다. 2018년 아르헨티나도 페소 가치가 폭락했었다. 그 역시 정치불안이 한 이유였다.
남말 할 것 없다. 한국도 1997년도 원화 가치가 폭락하고 IMF 구제금융을 받은 바 있다. 그렇게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대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그러한 조치들은 단기적 효과를 낼지언정 오히려 정책 신뢰 부족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무역정책도 통화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요즘처럼 한국의 정책이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 원화 가치에 부정적 충격이 가해지게 된다. 더구나 대미 관세협상 난항과 안보불안으로 인해 한국인들보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미래를 더 걱정해주는 판이다. 폐쇄경제 하에선 정부가 나서 환율을 고정시킬 수 있지만, 개방경제 하에선 환율이 다른 거시변수들보다 더 빠르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오버슈팅’(overshooting)이다. 쉽게 말해, 환율이 ‘오버’하는 것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기본 메커니즘은 체제 불안이다. 예를 들어 지정학적 긴장, 정책 비일관성 등의 경우다. 이는 그 나라에 돈을 묻어둔 투자자들에게 심한 불안감을 줄 수밖에 없다. 그게 흔히 말하는 ‘리스크’(risk)이다. 리스크가 커지면, 투자자들은 당연히 ‘돈’을 거둬간다. 그게 환율 변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건 지정학적 충돌 우려다. 그 경우 썰물 빠지듯 외국자본이 유출된다. 원화는 안전자산으로 인식되지 않기에 그러한 리스크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지정학적 충돌 가능성이 제기되면 원화 가치는 급전직하하게 된다.
현재 한국은 무역협상이 안보불안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지정학적 긴장 상태인 것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한국에서 자산 회수에 나서면 한화는 더욱 평가절하될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경기 둔화까지 겹쳐, 사람들이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을 기대하고 그에 따라 원화가치는 더욱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 경제 위기 상황인 것이다. 베네수엘라가 더 가까워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