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⑰ 우남과 반(反)대한민국 세력
이승만 "주주의만이 백성 행복"...많은 자유 민주주의 전복세력과 싸워
반봉건·반제·민족해방 외친 공산주의...민족의 자긍심·진정한 독립 파괴
김구는 미군 철수와 평화통일 주장...조봉암은 극단주의·공산주의 운동
우남은 반(反)대한민국 세력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는 포용적 사회고, 우남도 포용의 정치를 시작했다. 포용적 사회에서 반대한민국 세력이 세를 규합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전복하고자 소요를 일으켰고, 포용의 정치를 보인 우남은 수많은 배신자와 싸워야 했다.
공산주의는 반민주적이고 반자유적이며 국가 경제를 파괴하여 개인의 삶을 파탄 낸다. 공산주의의 거짓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쓰는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옥의 세상이고 노비적 삶에 불과하다. 보편적 복지는 노예의 길이고, 무상교육은 무지한 삶의 시작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특권 부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다.
◇ 민주주의를 믿고 국가 발전에 힘쓴 우남
우남은 1923년 ‘태평양잡지’를 통해 반공을 선언했다. 우남은 공산주의가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민주주의만이 백성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다. 우남은 민주적 소신에 따라 대한민국을 위해 투쟁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권력과 사익을 위해 민족을 배반하고 사상도 종교도 신념도 바꾸면서 살았다. 이동휘는 애국계몽운동을 하면서 기독교인이 됐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인연과 고향 서북 지역의 인연을 활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에서도 활동하면서 공산당의 세를 확대했다. 이동휘는 볼셰비키에 가담하고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했으며, 1921년 레닌이 보낸 자금을 받았다. 이후 이동휘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고 김립, 박진순, 이한영과 같이 활동한다. 1922년 12월 코민테른은 고려공산당을 해체하고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줬다. 임정을 분열하고 장악하려 한 이동휘와 그를 추종한 세력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과는 거리가 멀다.
공산주의자들은 반봉건, 반제, 민족해방을 외쳤다. 그들이 겨냥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고, 그들이 파괴한 것은 진정한 독립이었다. 코민테른은 1928년 8월 모스크바 코민테른 제56차 회의에서 개량주의를 배격한다고 선언한다. 이런 방침은 4개월 뒤 조선에 ‘12월 테제’로 전달됐다. 이에 신간회 해소가 추진된다. 신간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30년 파시즘이 등장했다. 1935년 7차 코민테른은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구축하고 배척했던 부르주아 그룹도 포함하게 된다. 1945년 9월 20일 소련은 북한에 반일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고 지시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변신에 능하다.
여운형은 변신에 능한 사람이었다. 볼셰비키에 가담한 여운형은 1922년 임정이 워싱턴 회의에 참여해 임정의 승인에 총력을 기울일 때 이를 반대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주최한 1922년 1월 극동근로자대회에 참석한다. 여운형은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10월에는 농민동맹을 결성한다. 여운형은 1945년 8월 14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에 거류 중인 일본인의 안전을 확보해 달라는 부탁도 받는다. 여운형은 임정을 해외독립단체가 만든 정부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면서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한다.
1945년 9월 6일 박헌영은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화시킨다. 1946년 2월 14일 민주의원 결성대회에 불참하고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에 참여한다. 김원봉, 허헌, 백남운, 박헌영, 여운형은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한다.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됐다. 민전과 남로당은 민족적 비극의 배후가 됐다. 여운형이 강조한 좌우합작은 임정에서도 그리고 해방정국에서도 반대한민국 세력에 힘을 보태는 결과를 초래했다.
◇ 반대한민국 세력, 민족의 비극만 초래
반봉건, 반제, 민족해방 운동은 반대한민국 세력을 강화했으며,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소련을 맹종하며 매국 민족의 폭력적 저항운동으로 변질했다. 민전과 남로당은 대구, 제주도, 여수 및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의 배후였으며, 대한민국과 우남은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반란을 수습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김구는 우남의 오랜 동지였다. 1932년대 우남이 임정에서 특명전권대사로, 그리고 1933년 국무위원으로 당선된 이면에는 김구와 이동녕의 역할이 있었다. 우남의 활동으로 국제연맹에서 일본의 잔학 행위가 폭로되고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 해방 이후 김구는 변신했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미군 철수가 가져올 민족적 비극을 예견했지만, 김구는 민족의 평화통일을 이야기하면서 미국 철수를 주장했다. 김구의 속내는 1948년 7월의 유어만(劉馭萬)과의 대화에서 밝혀졌다. 미군 철수와 평화통일이 종북적 언어가 된 지는 오래다.
조봉암은 극단적인 공산주의 운동인 아나키즘에 빠졌다가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고려공산당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고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로 활동했다. 우남은 포용적 정치를 위해 친일 행적도 있었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했다. 조봉암은 6개월 만에 양곡 보조금을 임의로 자신의 관사에 활용했다는 야당의 공세로 장관직에서 사퇴했다. 조봉암은 피해자와 평화의 개념을 왜곡해 반대한민국 세력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김일성과 소련은 북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반봉건 반제 민주기지 건설을 명목으로 내세웠다. 조봉암은 남한의 진보 세력이 뭉쳐 극우 반공 세력을 몰아내고 반제 반봉건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해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통일하자며 유사한 주장을 한다. 조봉암은 이런 평화통일을 지지해 줄 세력으로 피해대중을 목표로 삼았다. 반대한민국 세력은 피해대중을 보도연맹원, 이산가족, 노동자와 농민 등 근로대중들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피해의식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피해대중은 피해의식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들의 분노를 통해 남한에서의 민주적 혁명이 가능하고 반대한민국 세력의 용어로 평화통일이 실현된다.
우남은 반대한민국 세력과 투쟁해서 대한민국을 지켰으나, 반대한민국 세력은 우남을 폄훼하고 여운형과 조봉암을 매개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 왜곡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 1990년 8월 15일 북한은 중앙인민위 정령을 통해 112명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북한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투쟁한 인물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책, 서철, 강양욱, 허정숙, 남한의 열사 김세진, 조성만, 이한열, 이철규, 여운형, 임수경, 문익환, 문규현 등을 열거했다.
반대한민국 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의 의혈 투쟁을 우상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민족의 비극만 초래했다. 반봉건 반제 민주 투쟁은 소련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공산주의 운동이며, 반파쇼 투쟁은 사회주의자들의 파쇼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반자유 투쟁에 불과한 것이었다. 반대한민국 세력은 우리의 사고를 점령하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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