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⑫ 우남의 구미위원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유럽 등 자유세력과 연대 독립운동...단순 외교 기능 넘어 재정 조달 수행
美 의회에 한국 독립안 상정 이끌어...워싱턴군축회의 한국문제 상정 노력
이승만, 1941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활동...자유 민주주의 국가 건설 기여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기구다. 1919년 8월 25일 우남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명의로 구미위원부로 불리는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립했다. 구미위원부의 설립은 집정관 총재 공포문 제2호로 공포됐다. 따라서 구미위원부는 한성임시정부의 기구로 출발했다.
우남은 세계 정치를 주도하는 유럽과 미국이 우리의 독립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남의 생각은 옳았다. 구미위원부는 자유 세력과 연대해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구미위원부를 단순히 외교 담당 부서로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며,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독립된 이유를 망각하게 하는 일이다.
◇ 독립에 큰 영향력 행사한 구미위원부
구미위원부는 단순히 외교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재정 조달 기능을 수행했다. 구미위원부는 워싱턴사무소뿐 아니라 필라델피아통신부, 시카고통신부, 파리사무소, 그리고 런던사무소 등 사무소와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 등 42곳의 지방위원부를 가진 임시정부에 버금가는 조직이다.
상해임시정부(임정)가 좌우합작의 결과로 탄생한 것과 같이 구미위원부도 좌우를 떠나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을 포괄했다. 구미위원부는 사실상 미국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9월 4일 대한인국민회(국민회) 중앙총회에 전보를 보내 공채모집에 착수하라는 행정령을 내리고 공채권 조례를 발표했다.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임정보다 더 효과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좌우합작으로 출범한 임정은 출발부터 불협화음이 나기 시작했고, 이런 임정의 대표적인 기구로 인정받은 구미위원부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임정의 시각에서 구미위원부가 미국에 있는 임시정부와 같다고 생각될 수 있었다. 임정은 견제를 위해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1919년 12월 12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우남이 상해에 오기 전까지 우남의 대통령 권한 행사를 유보하고, 구미위원부는 외교 업무만을 하며 국민회의 애국금 수합업무는 그대로 시행하라는 결정을 한 것이다. 임정은 국민회를 통해 미주 지역에서 임정의 운영 자금을 조달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구미위원부를 견제했다.
이동휘와 안창호의 관계 때문인지, 국민회 총회도 구미위원부의 행정령에 반발하고 임정의 결정에 따른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통합해 만든 조직으로, 1915년부터 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 부회장은 박용만이었다. 국민회가 1919년 파리 강화회담의 특사로 우남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우남을 존경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국민회는 임정의 태도 변화로 1920년 2월 재정관할권을 구미위원부에게 넘긴다.
임정의 재정 수입은 1919년 5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13만 3118 은양(銀洋·Shanghai silver dollar)이었다. 구미위원부가 1920년 임정에게 송금한 금액은 1만 2258달러였다. 당시 환율을 감안했을 때, 구미위원부의 재정 지원은 임정 재정 수입의 15%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국민회의 직접적인 재정 지원도 있어 임정이 미주 지역의 재정 지원에 많이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구미위원부는 한국친우회를 조직해서 선전 활동을 추진하고, 미 의회 청원 운동과 워싱턴군축회의 참가를 시도한다. 한국친우회는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 조직한 기독인들의 모임이었다. 구미위원부는 1921년 7월 미국 내 21개 도시와 런던과 파리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했다.
구미위원부는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교수와 S. A.벡(S. A. Beck) 목사 등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연대해 미국 전역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다. 책자와 팸플릿도 간행해 배포했고, 2020년 9월까지 미국 언론에 9000여 회의 한국 관련 기사가 게재됐다. 구미위원부는 이런 홍보 활동으로 민주 국가인 미국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바꿔 미국 정부의 승인을 얻고자 활동했다.
구미위원부의 청원 운동으로 1920년까지 1년간 상원에서 18명의 의원이, 그리고 하원에서 3명이 한국 문제에 관해 발언한 것이 미국 의회 의사록에 기록됐다. 특히 1920년 3월 1일 한국 독립 동정안이 상원에 상정됐으나 34대 46으로 부결됐다.
◇ 우남, 임정 복귀 후 미국서 독립운동 지휘
구미위원부의 분수령은 워싱턴군축회의다. 상해로 갔던 우남은 대미 교섭력을 발휘해 미군함을 타고 다시 워싱턴에 돌아온다. 우남과 구미위원부는 워싱턴군축회의에 참여해 한국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했다. 임정은 외교후원회를 조직해서 지원했고, 국내에서는 이상재를 중심으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를 발송했으며 미주 교포들은 재정적 지원을 했다.
총력전을 통해 구미위원부는 워싱턴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고 한국 대표의 출석 및 발언권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우남과 서재필, 그리고 정한경과 고문관 프레드 돌프(Fred A. Dolph)가 대표단을 구성해 추진한 워싱턴회의 출석이 무산되고, 돌프가 작성한 임정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자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 달성했다. 이에 따라 임정의 신규식 대리 내각은 사퇴하고 대통령 불신임안이 상정돼 가결됐다.
워싱턴군축회의는 단순히 군비 경쟁을 막고자 한 회의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을 위한 회의이기도 했다. 이 회의를 통해 일본은 산둥반도에 갖고 있던 권익을 중국에 반환하고 시베리아에서 철수한다. 대중국 4개 원칙이 합의되어 동아시아에 대한 열강의 입김은 강화됐다.
한편, 공산 진영은 워싱턴회의에서 대응하기 위해 극동인민대표회의를 1922년 1월 21일에서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개최한다. 한국에서는 김규식과 여운형, 이동휘,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52명이 참가해 민족운동을 일으키고 임정을 지지하며 이를 개량할 것을 결의한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중심의 임정 장악을 선언한 것이다. 이들은 이후 임정의 분열뿐 아니라 한반도 분단의 씨앗을 만든다. 결국 임정은 1925년 3월 10일 우남을 탄핵하고 구미위원부를 불법 기관으로 지정하고 해체를 선언한다.
구미위원부는 임정이 해체를 선언한 이후에도 허정, 윤치영과 김현구 등에 의해 명맥이 유지됐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경기침체와 1929-1938년 기간 동안 대공황을 겪었다. 구미위원부의 활동 환경은 여의치 못했다. 구미위원부는 1927년부터 1931년까지 건물을 구해 뉴욕으로 옮긴다. 구미위원부는 뉴욕 한인유학생들의 협력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윤치영을 중심으로 1928년 1월 동지회 뉴욕지부가 설립돼 협력했다.
1933년 임정과 우남의 관계는 김구를 매개로 다시 복원된다. 1932-1933년 국제연맹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우남이 나선다. 우남은 1933년 국무위원으로 임정에 복귀하고 1934-1936년에는 다시 임정의 주미외무행서 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941년 임정은 주미외교위원부를 인정하고 우남은 주미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한다. 주미외교위원부의 영문 명칭은 구미위원부의 영문 명칭과 동일한 ‘Korean Commission’으로 정해졌다.
주미외교위원부는 미국이 전쟁 과정에서 한국인을 우호국 국민으로 인식하도록 활동하고 임정의 승인과 광복군의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구미위원부가 없었다면 카이로 회담이나 얄타회담도 없었고 귀속재산의 양도도 없었을 것이다. 구미위원부는 공산주의자들의 분열 책동을 극복하고 해방과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독립운동사에서 구미위원부의 위상을 제고하고 그 뜻을 기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