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⑱ 우남과 한미동맹

2차대전 끝나자 세계 정세 큰 변화...우남, 한국 방위에 미국 책임 강조
'워싱턴 네트워크 통해 미국 참전 호소...강력한 한미동맹 필요성 역설
휴전 앞두고 반공 포로 석방 초강수...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 당시 이승만 건국 대통령.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번영의 기초를 놓았다. 그 기초 중 하나가 한미동맹이다. 우남은 전쟁 후 세계 변화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가졌다. 그 혜안으로 우남은 미국을 설득해 미국과의 동맹을 구축했다. 한미동맹은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한미동맹은 우남이 아니었으면 달성할 수 없었다.

◇ 한반도 안보 위기 속 한미동맹 당위성 강조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회의’가 개최됐다. 동 회의에서 거부권이 논의되자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공동으로 방위한다는 ‘차풀테펙협정(Act of Chapultepec)’이 거부권에 의해 무력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국제연합은 거부권과 함께 집단 안보 체제를 인정하게 된다.

1946년 11월 3일 일본국헌법이 공표되고, 무장 해제된 일본을 통제하고 동시에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은 1947년 9월 주한 미군 철수가 국익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보고서에 근거해 한반도 안전 보장을 위한 아무런 조치 없이 철군했다. 우남은 동아시아 안보 체제에 일본 중시의 미국 시각을 우려했다. 우남은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일본내막기)’이라는 본인의 저서에서 알래스카와 필리핀, 괌과 하와이가 전략적 요충지라고 강조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자간 지역 안보 체제를 밝힌 바 있다.

우남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국제 사회에 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했고, 건국 후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받았다. 1949년 3월 18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내용이 알려지자, 필리핀 대통령인 엘피디오 퀴리노(Elpidio Quirino)는 나토와 같이 아시아 지역에서 집단 안보 체제인 태평양동맹 결성을 제창했다. 우남은 1949년 4월과 5월에도 대한민국 방위에 있어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으며, 1949년 7월 11일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나토와 같은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할 것과 방어 무기와 장비를 요청했다. 미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미군은 남한에서 1948년 9월 15일 이후 철수하기 시작해 1949년 6월 30일에는 완전히 철수했다.

1953년 8월 경무대(청와대)에서 변영태 외무장관(왼쪽)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 한 후 악수를 하고 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반도의 안보가 위태로워졌으나, 미국은 일본과 인도 중심의 아시아 경제 질서 재편을 시도했을 뿐이다. 한국과 미국은 1950년 1월 21일 한국군의 장비 유지와 보수를 지원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했으나, 미국 의회는 1950년 1월 한국경제원조안을 부결시킨다. 1950년 2월 14일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에는 ‘일본제국주의 부활 및 일본의 침략 또는 침략 행위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 일본과 연합하는 나라의 침략’을 공동으로 방지한다고 기술됐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했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부통령이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상원 원목으로 트루먼과 친분이 있었던 프레데릭 해리스(Frederick B. Harris) 목사도 도움을 주었다. 우남과 해리스 목사의 관계는 특별하다. 1939년 우남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Francesca Donner Rhee)는 해리스 목사의 파운드리 교회 교인이 됐다. 1942년 2월 9일 우남의 설득으로 해리스 목사는 한미협회 이사장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0월 10일 미국 상원의 원목으로 취임했다. 해리스 목사는 우남의 동지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동참했고, 6·25 전쟁이 나자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우남의 공식적인 요청도 있었으나 우남의 워싱턴 네트워크가 있었다.

◇ 우남, 한미동맹 발판으로 국가 발전 이끌어

미국은 6·25 전쟁 참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중시의 안보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1951년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려고 노력했다. 우남은 이 조약이 일본을 부상시키고 동아시아의 안보적 긴장을 강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남은 미국에 양유찬 대사를 보내기도 하고 변영태 외무장관을 보내서 우려를 표명했다. 우남은 수많은 연설에서 미일안전보장조약보다 더 강력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을 해결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행정부가 1953년 1월 출범하면서 휴전을 서둘렀다. 우남은 1953년 4월 30일 국제연합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에게 중공군과 국제연합군의 동시 철수 조건으로 안전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남은 어떤 상황에서도 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서 활동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은 건국 이후 어느 국가하고도 상호 방위 동맹을 맺지 않았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소극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군을 1개 해병여단이 포함된 20개 사단 규모로 증가시키는 군사적 지원을 제시하기도 하고 우남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Ever Ready Plan)을 검토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휴전이었다.

1953년 2월 22일 병상 포로가 우선 교환됐고, 1953년 6월 17일에는 대부분의 조항에 대한 합의가 진행됐다. 미국과 유엔군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관철하지 못하고 강제 송환을 주장하는 공산권의 반인권적 주장과 타협해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기로 합의했다. 6월 18일 우남은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한다. 우남은 공산권과의 합의에 불만을 표시하고 옳은 일을 감행했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7월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의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한국 통일을 위해 간청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있다. 이 대통령 뒤쪽은 리처드 닉슨 부통령(왼쪽)과 조셉 마틴 하원의장.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의 반공 포로 석방을 본 미국은 다급해졌다. 1953년 6월 26일부터 2주간 우남과 월터 로버트슨(Walter Spencer Robertson) 미국 국무차관보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대한경제원조 및 군사원조 등 필요한 사항들을 논의했다. 미국은 휴전 회담에 비협조적인 한국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끊는다는 압박도 했다. 8월 4일에는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국무장관이 방한해 우남을 미국으로 초청하고, 1954년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도 우남을 초청했으나 우남은 모두 거절한다.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검토를 통해 한미동맹을 결심한다. 한미 양국은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고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체결한다. 1954년 11월 18일 조약 발효로 한미동맹은 굳건하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미국의 초청을 거절했던 우남은 195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미국을 국빈 방문해 한국의 해양 진출을 공식화한다.

우남은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았고, 이를 이용해 북한과 공산국가들의 침략을 물리쳤다. 우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불가능했던 한미동맹을 구축한다. 우남의 한미동맹으로 대한민국은 세계로 뻗어나갔고 풍요를 누렸다. 우남은 마치 불가능을 가능케 한 하늘의 뜻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우남의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대한민국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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