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⑲ 우남의 대일관계

'한국교회핍박' 통해 日만행 알려...1941년엔 '재팬 인사이드 아웃' 저술
해방후엔 미국과 대일압박 강화...일본에 대마도·침탈 예술품 반환 요구
'과거사 반성' 요구 등 대일 강경책...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안보 강화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 당시 이승만 건국 대통령.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평생 항일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으로 나라를 이끈 지도자다. 우남이 지도자로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국제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일관계를 이끌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남은 현재와 미래의 대일관계 형성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우남은 자신의 저서 ‘독립정신’에서 밝힌 소신과 같이 일본과의 교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국권을 지켰다. 우남은 더 나아가 우리 국민이 다시는 멍에를 짊어지지 않도록 일본을 경계했다.

혹자들은 거짓된 것을 만들어 일본을 비난하는 것이 항일 운동인 줄 알고,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친일파라고 욕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우남은 달랐다. 우남은 ‘독립정신’에서 일본에 대해 ‘사납고 독살스러운 성품은 칭찬해 줄 만한 게 아니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기개는 본받아도 될 만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러시아와 중국, 일본 모두가 우리를 침탈하려 넘보고 있으니 자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 민족 번영 위한 국제 교류와 협상 중요시

우남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대통령을 만나 조국의 어려움을 외교적으로 풀려는 마음을 갖고 도미하여 국제관계 전문가로 성장했다. 조국에 돌아와 YMCA에서 자강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탄압으로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1913년 저술한 책이 ‘한국교회핍박’이다. 우남은 객관적이면서 논리적으로 일본을 비판하고, 일본의 만행과 교회에 대한 핍박을 세계에 알렸다.

1941년 6월 우남이 저술한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일본내막기)’도 일본의 본질을 파악하고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세계에 알렸다. 우남의 예측이 실제로 벌어지자 미국은 경악했다. 분노를 논리적으로 승화해 항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남의 힘이다.

1953년 1월 5일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과 일행. 왼쪽부터 백선엽 장군, 손원일 제독,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미국 장성 부인들, 이승만 대통령, 마크 클라크 장군 등.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1904년 ‘독립정신’에서 주장했듯이 국권을 보호하고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 세계 국가들과 통상하고 교류해야 한다는 두 과제를 동시에 추진했다. 해방과 미군정으로 막힌 한일 관계를 풀어내는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이었다. 이를 위한 우남의 대일 협상 전략은 국민의 자긍심을 고양하고,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 대일 압박을 강화하며 일본과의 협상에 필요한 명분과 협상의 지렛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948년 8월 17일 기자 회견에서 우남은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뿐 아니라 일제의 40년 한국 통치 기간 중 일본이 가져간 예술품과 역사 기록을 전부 반환케 하고 한국 내 일본인 재산도 한국 정부에 귀속하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우남은 강조한다. 1948년 9월 30일 우남은 국회에서 정부의 시정 방침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침략주의적 근성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고 대일강화조약에 대한 대응 노선을 천명했다. 1949년 1월 24일 국무회의에서 법무장관이 특별조사기관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고 2월 ‘대일배상청구위원회’가 조직됐다.

우남은 일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의 일본 우선 정책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다. 우남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면서 1949년 3월 필리핀 대통령인 엘피디오 퀴리노(Elpidio Quirino)가 제안한 태평양동맹 결성에 찬성하는 담화를 발표한다. 우남은 집단 방위 조항이 포함된 태평양동맹에 미국이 참여할 것을 요청하고 일본은 일단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 미국에 대한 압박이지만 미국은 존 무초(John J. Muccio) 대사를 통해 우호통상조약 체결을 고려할 수 있다는 답변으로 우남의 제안을 간접적으로 거절한다.

더욱이 미국은 우리의 대일 배상 요구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우남은 1949년 5월 16일 임병직 외무장관에게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반박하는 담화를 발표하게 하고 7월 8일에는 기자 회견에서 연합국 최고사령부 내에 윌리엄 시볼드(William J. Sebald) 등의 친일 미국인이 있다고 비난한다.

◇ 대일 강경책으로 국교 정상화 유리해져

1949년 6월 30일 미군은 한국에서 전면 철수했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1950년 1월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통해 일본 중심의 안보 체제를 선언했다. 우남은 대일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안보 체제를 강화해야 했다. 1950년 2월 17일 우남은 방일하여 요시다 수상과의 회담에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반공 동맹을 논의하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마크 클라크 장군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 클라크 장군 저택에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클라크 장군, 백선엽 장군, 김용식 주일 공사,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오카자키 가쓰오 일본 외상 등이 한자리에서 촬영한 단체 사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미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패전국에 대한 배상 요구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일배상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대일강화조약을 맺고 향후 일본을 관리하는 전략을 택했다. 1950년 4월 19일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아시아 정책 및 대일강화조약에 관한 수석고문으로 임명됐다. 덜레스는 태평양동맹을 반대했다. 미국의 협조를 통한 대일 압박의 카드가 없어진 셈이다.

한국전쟁으로 우남의 일본에 대한 강경 정책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1951년 9월 미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미군정이 한국 정부에 이양한 귀속 재산만이 명문화됐고, 독도 영유권 확인 문제, 재일한국인 지위 문제, 어업 문제는 결국 한일 양국의 협의 사항으로 남겨지게 됐다. 1951년 10월 미국은 한일예비회담을 주선했다. 우남은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청산해야 할 과거가 없다며 새로운 관계 수립만을 주장했다. 미국의 입장이 분명한 상황에서 한일 양국은 평행선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우남은 새로운 전략을 구사한다. 현존하는 공산국가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한편, 일본의 부상으로 동아시아의 안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안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일본의 협조가 없어도 안보 문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해결됐다. 우남의 강경 대책은 다시 힘을 얻는다.

1956년 10월 26일 서울 창경궁에서 열린 반공전람회에 설치된 ‘자유관’의 목적을 담은 전시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독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하고 일본의 어업 활동을 제한했다. 우남은 경제 재건에서 일본산 물품 구매를 거부해 왔다. 1953년 10월 15일 3차 한일회담의 재산청구권위원회 2차 회의에서 구보타 간이치로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1958년 4월까지 회담은 결렬됐다. 우남의 강경책은 회담 결렬 이후 더 강화된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지기까지 이승만 라인을 침범한 328척의 선박과 3929명의 일본인이 나포됐다.

우남은 국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일련의 정책도 실시한다. 우남의 강경한 대응이 없었다면 한일국교 정상화에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래를 보는 우남의 지혜가 드러났다. 우남의 정신은 승일의 정신이다. 우남은 미래지향적 관계를 존중하고 국제사회의 평화와 교류를 강조하면서도 국권을 소중하게 여기고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했다. 우남은 대일협상에서 유연하면서 강경했고 미래지향적 대일관계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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