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건국한 우남의 일성은 포용이었다. 우남은 공산주의자들의 매국 매족 행위를 중단하고 대한민국을 함께 건설하자고 외쳤다. 우남은 공산주의자 조봉암도 내각에 중용했으나, 조봉암은 배임 횡령 혐의로 낙마했다. 김구는 대한민국에는 임시정부(임정)의 법통이 없다고 주장하고 대한민국을 폄훼했다.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자, 기회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나섰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우남을 끌어내리려고 한다. 우남과 대한민국은 자유의 상징, 발전의 상징, 그리고 민주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서 기독교의 기여는 특별했다. 모든 사람이 함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모든 종교가 우리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기독교와 우남은 위기 때마다 기적처럼 위기를 극복했다.우남은 과거를 준비하던 평범한 조선 유생이었으나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됐다. 우남은 장학금도 준다길래 신흥우를 따라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우남은 그곳에서 기독교를 만났고, 기독교는 우남을 키웠다. 우남은 선교사들에게 지식뿐 아니라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배웠다. 우남은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인권과 자유를 향유하면서 스스로 설 수 있는 세상,
우남은 기독교인이다. 우남은 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폄훼하거나 종교인을 핍박한 적이 없다. 더욱이 우남은 불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불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우남의 모친은 불교 신도로 파주 용암사 쌍미륵불에 기도한 후에 우남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직도 파주 용암사에는 1954년 우남의 시주로 건립한 동자상이 있다. 우남은 유시에서도 본인이 어렸을 적에 불당에도 다녔고, 불공에도 참여했음을 강조했다. 우남은 "명산대천 곳곳에 유명한 사찰과 불당이 있어 각각 빛난 역사를 가졌다"고 지적하면서 불교 유산을 자랑스러워
우남은 건국 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남은 평생 교육에 헌신한 교육자이다. 1902년 우남은 ‘뎨국신문’에 교육의 자유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우남은 세계 유명 대학교들이 자율적으로 학사를 운영하고 존경받는다고 주장했다. 1903년에는 ‘신학월보’에 ‘교회경략’이라는 기고문에서 만민 평등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1904년 우남은 상동청년학원에서 교장직을 수행했다. 1910년 우남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YMCA에서 학감으로 교육과 전도
우남은 포용의 정신으로 건국했지만, 좌익 세력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세력 확장과 남한의 치안을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됐다. 우남은 공산주의자들의 파괴 행위를 극복했고, 극복 과정에는 대한민국 경찰과 국군의 헌신이 있었다.◇ 건국 이후 혼란 속에 경찰 대상 범죄 급증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에 경찰을 총괄하는 중앙조직으로 치안국이 설립됐으며, 지방에서는 도지사 산하에 경찰국이 설립돼 분권적 경찰제도가 출범했다. 1948년 7월 17일 내무부 산하에 치안국이 설치됐고, 9월 3일 대한민국은 미군정청으로부터 국립 경찰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우남은 에너지 정책으로 기적의 초석을 놓았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단전이라는 반민족 행위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해방 당시 남한은 전력 공급의 60~70%를 북한에 의존하고 있었다. 갈수기에는 남한의 북한 전력 의존도가 90%까지 올라갔다. 북한 전력 의존도는 1947년 1월은 86%, 2월 87%였다. 우남은 암흑의 세상을 밝히기 위해 전기바지선(電氣 barge船)을 가져다 전력을 공급했지만, 부족분의 50% 정도만을 공급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에너지 빈국으로 출발했다.조선의 경제 구조는 1차 산업 중심의
우남이 추진한 경제 정책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우남은 해방 이후 경제적 단절을 극복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풍요의 초석을 구축했다. 미국의 대공황을 극복했다고 칭송받는 루스벨트 대통령도 1939년에서야 1929년 수준의 경제를 회복했다. 미국은 독립 당시 영국과의 경제적 단절로 인해 대공황보다 더 심각한 경제 침체를 겪었다. 대한민국도 해방 이후 일정기의 경제활동 체제가 붕괴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우남은 더욱이 전쟁의 폐허도 극복했다.◇ 농지개혁과 환율제도로 경제 안정 추구포용을 위해 등용한 공산주
우남은 새로 건국된 대한민국의 경제를 발전시킨 경제 지도자였다. 우남은 ‘독립정신’에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드는 필수 요건으로 통상을 강조하고, 영국의 사례를 들면서 안보와 경제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남은 국제통상을 잘 이해한 지도자다.우남은 ‘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1924년 동지식산회사 설립을 주도한다.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우남은 농민과 기업인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경제를 부흥시킬 지혜를 터득했다. 우남은 우리 민족의 고난을 극복할 준비된 지도자였다.◇해방 이후 극심한 혼란 속 경제 부흥 도모우남은 건
우남의 농지개혁은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된다. 지금도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주장하며 우남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있다. 십계명이나 팔조법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는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것을 죄악시했다. 우남이 없었다면 시장경제 원칙을 지킨 농지개혁은 없었다. 해방 이후 농촌의 빈곤은 누구나 지적하는 문제였다. 농지개혁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농지만 개혁되면 경제가 발전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반대한민국 세력이 찬양하는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로 토지개혁을 한 북한은 경제는 망하고 농민도 궁핍한 생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안팎에서 불었던
우남은 건국 대통령으로서 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고 강화한 부국의 대통령이다. 우남은 일정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각과 미래를 경험한 우남의 비전을 현실에서 조화한 지도자다. 시장경제 체제는 헌법만 아니라 다양한 법률과 제도 등으로 만들어진다. 우남은 국민 의견을 수렴하면서 헌법 개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시장경제 체제를 강화했다.시장경제는 가격 조정에 의해 재화와 용역의 소비와 생산이 결정되고, 소득과 자원이 배분되는 경제다. 이를 위해 개인의 재산권은 보호되며, 가격은 자유롭게 수요와 공급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개인의
우남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국가를 수호하여 번영의 길을 열었다. 우남은 공적인 제도와 국민의 관습이 조화를 이뤄야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남은 국민이 원하는 곳에 달려갔고, 언제나 국민과 소통했다. 자유 민주주의로 건국된 나라를 민주화했다는 궤변이 인구에 회자되고, 자칭 민주화 세력이란 사람들은 제1공화국 시기를 폄훼하고 있다. 건국 부정 세력이 득세하는 지금, 우리는 우남의 현실 정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광폭 지지로 대통령 당선...역할은 제한적1948년 5월 10일
우남은 평생 항일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으로 나라를 이끈 지도자다. 우남이 지도자로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국제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일관계를 이끌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남은 현재와 미래의 대일관계 형성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우남은 자신의 저서 ‘독립정신’에서 밝힌 소신과 같이 일본과의 교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국권을 지켰다. 우남은 더 나아가 우리 국민이 다시는 멍에를 짊어지지 않도록 일본을 경계했다.혹자들은 거짓된 것을 만들어 일본을 비난하는 것이 항일 운동인 줄 알고, 일
우남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번영의 기초를 놓았다. 그 기초 중 하나가 한미동맹이다. 우남은 전쟁 후 세계 변화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가졌다. 그 혜안으로 우남은 미국을 설득해 미국과의 동맹을 구축했다. 한미동맹은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한미동맹은 우남이 아니었으면 달성할 수 없었다.◇ 한반도 안보 위기 속 한미동맹 당위성 강조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회의’가 개최됐다. 동 회의에서 거부권이 논의되자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공동으로 방위한다는 ‘차풀테펙협정(A
우남은 반(反)대한민국 세력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는 포용적 사회고, 우남도 포용의 정치를 시작했다. 포용적 사회에서 반대한민국 세력이 세를 규합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전복하고자 소요를 일으켰고, 포용의 정치를 보인 우남은 수많은 배신자와 싸워야 했다.공산주의는 반민주적이고 반자유적이며 국가 경제를 파괴하여 개인의 삶을 파탄 낸다. 공산주의의 거짓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쓰는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옥의 세상이고 노비
우남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헌법을 만드는 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우남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건국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헌법 제정이다. 우남은 청년 시절 저술한 ‘독립정신’에서 세계의 정치 제도를 전제정치, 헌법정치, 그리고 민주정치로 설명하고 이 세 가지 정치체제 중 민주정치를 선미(善美)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우남은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 그리고 헌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우남, 백성 권리 기반 ‘대한민국’ 국호 제안우남은 헌법으로 백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왕이나 관리,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공산주의와의 투쟁은 빠질 수 없다. 건국과 호국, 그리고 부국의 과정에서도 우남은 공산주의와 투쟁했다.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건국된 대한민국은 자신을 지키고 풍요를 구가하기 위해 지금도 공산주의와 투쟁해야만 한다. 우남은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빛났고 대한민국은 반대한민국 세력 그리고 공산주의와 투쟁해야 하기에 지금도 우남을 기려야 한다.◇ 공산주의 훼방에도 굳건했던 독립투쟁우남이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면서 공산주의를 경험했기 때
우남의 항일 독립투쟁 방향은 국제 사회에 대한이 독립국임을 각인시키고 우리 민족을 독립정신으로 무장시킴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다. 우남의 항일 투쟁은 평화적이었으며 전략적이었고, 효과적이었다.무장 독립투쟁은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청산리 전투로 무엇을 얻었는가. 일제의 ‘간도지역 불량선인 초토계획’으로 우리 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중국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 해산을 종용하고, 독립군은 공산주의자들에 속아 자유시 참변을 겪고 몰살 당한다. 순사 3명과 보조원 2명이 있는 주재소를 공격해 2살짜리
우남의 일생은 전쟁이었다. 우남은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일념으로 활동하다가 한성감옥에 갇힌다. 우남은 한성감옥에서 신앙을 갖게 됐다. 신앙이 우남을 이끌었고, 세상이 우남을 따랐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유 민주주의의 상징인 우남을 폄훼했다.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우남을 꺾든지 아니면 우남을 따르든지 하는 두 가지 선택지만 가지고 있었다. 혹자는 우남을 따르다 우남을 배신했다. 우남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공산주의와 투쟁하면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과연 우남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우남을 지탱한 신앙과 기독교 네트워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기구다. 1919년 8월 25일 우남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명의로 구미위원부로 불리는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립했다. 구미위원부의 설립은 집정관 총재 공포문 제2호로 공포됐다. 따라서 구미위원부는 한성임시정부의 기구로 출발했다.우남은 세계 정치를 주도하는 유럽과 미국이 우리의 독립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남의 생각은 옳았다. 구미위원부는 자유 세력과 연대해 우리의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대한민국은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의 헌신 위에 건국됐다. 독립을 위해 일하신 분 중에서 소중하지 않은 분이 없겠으나, 우남의 공헌은 빛났다. 독립운동사에서 우남의 위상은 독보적이다.독립에 대한 공헌의 정도를 평가하기 위해 독립을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단계는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실력을 양성하는 단계다.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실력 양성 운동으로 성과를 낸 분들은 많지 않다. 우남은 인력 양성에 구체적 성과를 냈고, 여성의 인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