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전경우

11월 11일은 유엔참전용사 국제 추모의 날이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미국과 호주·필리핀·네덜란드·콜럼비아·에티오피아·벨기에·스웨덴 참전용사 12명과 유족들이 참석했다.

참전용사 중 최고령자는 95세인 호주의 존 머피로, 가평 전투 중 수류탄 폭발로 부상을 입고도 마량산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장진호 전투 등에서 활약한 미국 아우렐리오 루이즈(94세) 용사는 참전 후 73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고마운 분들이다.

이런 사실은 ‘빼빼로 데이’에 묻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6·25전쟁 참전용사들 덕분에 대한민국이 존립 번영하고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지킬 수 있었다. 하품 나는 소리 같지만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분들이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950년 7월 1일 미군 제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부산을 통해 들어오고 유엔군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김일성으로선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셈이다.

당황한 김일성은 6·25전쟁이 남침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 만인 1950년 7월 8일, 김일성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직접적 무력간섭이 없었더라면 조국의 통일은 완성됐을 것이며, 남반부 인민들이 이승만 역도들의 반동적 경찰통치로부터 완전히 해방됐을 것이라고 방송 연설을 했다.

그 전에, 전쟁을 일으킨 다음날인 6월 26일 김일성은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한 주민들이 총궐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남쪽에서 6월 25일 새벽 38선 이북을 전면 공격해 왔고 이에 인민군이 맞서 반격했으니, 남북 인민들도 함께 들고 일어나 싸우자고 한 것이다.

김일성은 남한의 남녀 빨치산들에게 유격운동을 한층 맹렬하게 더욱 용감하게 전개하고 해방구를 확대 창설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적의 후방에서 적들을 공격 소탕하고 적의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도로·교량·전신전화선을 절단 파괴하고 반역자들을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남반부 농민들을 향해서는 적에게 식량을 주지 말고 빨치산 운동에 전면적으로 참가하며 인민군에게 협조와 원호를 아끼지 말라고 지시했다. 남한의 노동자들에게는 도처에서 태공(怠工)하며 총파업과 폭동을 일으키고 공장·직장·광산·철도 등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고 나면 자신이 명령한 대로 남한의 빨치산과 농민 노동자들이 남로당과 함께 들고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남한에서 붉은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도 잠잠하기만 했다.

북한 부수상 박헌영도 6월 28일 방송을 통해 왜 남반부 인민들은 총궐기를 하지 않는가, 적의 후방에 있어서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이니, 전력을 다해 대중적 정치적 폭동을 일으키라고 다그쳤다.

그랬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들고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자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주사파들이 대학을 해방구로 선포하고 노조가 걸핏하면 파업과 폭동을 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또 다시 광장이 신음하고 있다.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험악한 구호가 하늘을 찌른다. 촛불을 다시 들자며 악을 쓴다. 갈 길 바쁜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거리가 뒤엉키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당하게 사명을 다하고 있는 어린 경찰들이 공격을 당하고 상해를 입었다.

광장을 뒤흔들고 있는 노조의 무리 가운데 3명이 감옥으로 갔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런 자들이 더는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국가 기간시설 타격을 모의하고 내란 선동을 꾀하다 헌법재판소에서 해산 판정을 받은 자들과 같은 패들이 이끌고 있는 단체다. 불온한 세력들이 나라를 침탈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더 강해져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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