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
황근

이쯤 되면 법의 오·남용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악성 허위조작 정보를 근절하기 위해 정보통신망법에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을 추가한 데 이어, 이번에는 언론중재법까지 개정하겠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정보통신망법과 사실상 대동소이하다. 정보통신망법에 규정된 ‘허위조작정보’가 ‘허위조작보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타인에게 해할 것이 분명한"처럼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정의들도 그대로 담고 있다.

우선 사실상 동일한 처벌 내용을 두 개의 법으로 규율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맞는 것인지는 충분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정보통신망을 통해 유통되는 정보와 함께 언론보도까지 규제대상에 포함시켜 규제 형평성과 효과성을 높여보자는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매체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고 있는 디지털 융합 시대에 ‘허위조작정보’와 ‘허위조작보도’ 구분이 가능한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실제로 ‘무슨 무슨 미디어 혹은 방송’이란 간판을 단 수많은 유튜브들이 쏟아내는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사실들은 허위조작정보일까 허위조작보도일까? 경험적으로 볼 때 이렇게 애매할 경우 십중팔구 정보나 보도 모두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정보통신망법과 언론중재법에 동일한 처벌 규정을 두는 것은 필연코 중복 규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제16조 1항에서 반론보도청구권 대상을 ‘사실적 주장’으로 한정하고 있던 것을 모든 기사로 확대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사실 보도뿐 아니라 사설·해설·논평·시론 같은 의견 기사들까지 모두 규제 대상에 포함된다.

이는 프랑스 인권선언이나 미국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권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자유민주주의 국가도 이런 식의 통제를 법으로 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언론의 권력 감시와 사상의 다양성을 허용치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허위조작보도에 대한 처벌 주체를 문화체육부장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정보통신망법에 포함된 ‘피해자에 의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수용하지 않고 있다. 결국 언론중재법에 의한 처벌 규정은 분명한 정부 규제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게 징벌적 배상과 정부 과징금은 병행하지 않는다는 이중처벌금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또한 정보통신망법에서도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에게 허위조작 정보에 대한 과징금 부과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두 정부 부처가 언론보도와 개인의 표현활동을 함께 규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법의 남용이고 과잉규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징벌제 배상제도가 국가권력에 대한 언론의 감시 기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취지를 본질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을 포함한 모든 온·오프라인의 표현행위들이 정부 다중 감시 아래 놓이게 되는 셈이다. 마치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덤이 구상했던 ‘원형감옥’(panopticon)에 모든 언론이 갇혀 자발적 통제에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타났던 권력 기구들 간 규제 경쟁을 촉발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이유가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에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가 21세기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부했던 대한민국에서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만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관료들이 표현의 자유를 자의적으로 규정해 억압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한국 정부의 표현의 자유 억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에서 레비츠키와 지블렛 교수가 지적한 ‘법을 무기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네 가지 방법’이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시연되고 있는 느낌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 자유는 국가권력이 언론의 감시와 견제를 참고 인내하는 데서 실현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