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승
이양승

금융시장에서 거품은 단순히 가격 상승 문제가 아니다. 거품이란 자산 가격이 내재가치에서 체계적으로 이탈하는 비정상적 상태를 의미한다.

가격이 오르면 대개 수요가 줄어든다. 하지만 거품 상태에서는 반대다. 오히려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 더 오를 걸 기대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기대를 하면 그 기대는 실현된다. 그러한 기대의 자기실현적 순환이 작동하면 이미 그 시장은 거품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쉴러가 말한 ‘비정상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그는 금융시장은 심리학의 영역에 가깝다고 강조한 바 있다.

쉴러의 관점에서 보면, 거품은 ‘서사’(narrative)의 문제다. 최근 ‘빚투’가 권장되며 ‘돈을 이렇게 벌었다’는 식의 서사가 창궐하고 있다. 그만큼 정보 왜곡도 많고 헛소문도 빠르게 번진다. 서사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시장 참여자들이 기업 실적 수익성보다 서사에 더 의존하기 시작할 때 가격은 내재가치와 분리되기 시작한다.

최근 한국 금융시장은 쉴러가 말한 과열의 전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 같다. AI 버블론, 원화가치 급락, 과도한 빚투, 그리고 가계부채의 구조적 취약성까지 곳곳에 위험신호가 켜져 있다. 일확천금 서사가 시장을 지배하고, 기대가 기대를 밀어 올리는 전형적인 거품 단계로 볼 수 있다. 가계부채는 이미 GDP의 105% 수준에 달해 있다.

더 심각한 건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고 최소한의 경고라도 내놔야 할 정부와 정책 당국이 오히려 개미들의 FOMO(Fear Of Missing Out:기회 놓칠까 두려워하는 심리)를 자극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빚투를 ‘레버리지’라고 표현한 한 고위직 인사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금융 안정성이라는 본연의 임무 대신, 마치 빚을 내서까지 투자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격이다.

정부의 ‘5000피’ 집착도 오버스럽다.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과 무관하게 ‘지수를 올려야 한다’는 서사 강조로 비칠 수 있어서다. 이는 정책 당국이 물가 안정·환율 관리·가계부채 억제라는 가장 기본적인 거시경제 안정 책임을 깜빡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히려 정책 신호를 통해 주가상승 기대를 강화, 거품 생성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 정책이 시장 안정은커녕, 서사경제학(narrative economics)을 증폭 확산시키는 매개가 되어선 안된다.

현재 한국 금융시장은 거품 형성의 마지막 단계, 즉 투기적 기대의 자기실현적 순환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빚투 서사와 정부 메시지가 결합하며 기대가 부풀고, 빚과 대출이 그 기대를 매수세에 반영시키며, 단발적 가격 상승이 기대심리를 강화하는 악순환이다. 문제는 거품 붕괴다. 시장 내 작은 충격이 큰 폭풍을 몰고올 수 있다. 예를 들면 금리 역전, 주요국의 통화정책 변화, 지정학적 충격 등이 작은 날갯짓이 될 수도 있다.

폭풍을 막는 방법은 명확하다. 무엇보다 정책 당국의 신호주기 방향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과열기에서 정부는 투자 독려보다 억제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지금의 상태는 경기과열이 아니라 심리과열이다. 거품은 심리에서 시작해 심리에서 끝난다. 지금 필요한 건 지수 올리기보다 시장 안정화와 경제의 내구력 강화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대출규제 점검, 시장정보 대칭화, 금융교육 강화 등 장기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한국의 진짜 문제는 코스피 지수가 아니라 투기심리 과열 방지를 위한 정책적 균형추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젠 ‘더 사라’는 말 보다 ‘신중하라’는 말 한마디 던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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