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승
이양승

사람들은 ‘비극’하면, 빵 하나 훔쳐먹고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을 떠올린다. 빵 한 조각 베풀 만큼 인정머리 없는 사회는 물론 비극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극은 해결 가능하다. 누군가 인정을 베풀면 된다. 진짜 비극은 인정머리와 상관없이 베네수엘라처럼 시장 시스템이 붕괴되는 경우다. 바로 ‘공짜의 비극’이다.

생계를 위해 품을 팔려 해도 노동시장이 없고, 집구석에 빵이 남아돌아도 그 빵을 내놓을 상품시장이 사라진다. 베네수엘라에서 배고픈 아이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이유다. 잘못은 그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있다. 베네수엘라는 땅도 자원도 한국보다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폭삭 망했다. 이론적으로, 시장 시스템이 붕괴되어 자원배분이 되지 않는 상태다.

요즘 나오는 말이다. "고신용자에게 대출이자를 올리고 저신용자에게 대출이자를 낮추자." 그 저신용자들 중에 장발장이 뒤섞여 있을 수도 있겠다. 배고픈 장발장에게 빵을 베풀자는 그 취지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장발장을 볼모로 잡은 베짱이들이다. 장발장과 베짱이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 분별을 위해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냥 돈 보따리를 먼저 풀고 보는 식은 곤란하다. 관건은 게임이론 관점에서, 스크리닝 즉 ‘옥석 가리기’다. 장발장 도우려다 베짱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비극을 맞을 수 있다.

이자는 거시 시장에서 가격 개념이다. 현재소비냐 미래소비냐 ‘기간 간 선택’(intertemporal choice)으로부터 발생한다. 누군가는 미래가치 창출을 위해 현재소비를 자제한다. 은행에 예금을 하고 이자소득을 얻는다. 그 이자는 공짜가 아니다. 현재의 소비욕망을 자제한 인내의 결과다. 베짱이들은 자제하지 않고 인내심도 부족하다. 그들에게 이자를 낮춰주는 건 마치 청소년들에게 술 담배를 싸게 파는 것과 비슷하다.

정말 청소년들을 위한다면 그들에게 술 담배를 팔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팔았다면 그 무책임한 어른들을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청소년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도리어 술 담배를 보다 저렴하게 팔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그들에게 현금을 쥐어주되, 술 담배 구매를 불허하는 게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저신용자=빈자(貧者)’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빈자가 저신용자인 게 아니라 저신용자가 빈자인 것이다. 순차성이 작용, ‘저신용’이 ‘가난’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는 그 가난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때일 것이다. 저신용자들 중에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영화 ‘타짜’에 나오는 도박 중독자들이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리얼’하다.

저신용자들에게 낮은 이자를 적용하면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열심히 노력해 고신용자가 될 유인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고신용자에게 높은 이자를 물리자고 주장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만큼 신용불량자에게 관대한 나라도 없다.

늘 강조하지만 자본주의는 유인체계다.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대전제인 것이다. 그렇게 유인체계를 무시하고 정략적 정책을 발굴할 거면 자본주의를 포기하는 게 빠르다.

돈을 일부러 안 갚는 사람들도 많고, 정부 지원금 받아 사업을 방만하게 하는 경우들도 많다. 억지 주장이 아니다. 밥값 내겠다고 대출받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개 백일몽처럼 자신에 대한 ‘과대신뢰’(over-confidence)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비즈니스를 도박처럼 여긴다. 그런 이들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도 현재의 사업 욕망을 자제하는 게 맞다.

청소년들에게 술 담배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건 싸가지 부활 시대를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자제력 부족을 우려해서다. 대출도 마찬가지다. 돈을 잘 갚는 이들이 대출을 더 쉽게 받는 게 맞다. 장발장을 돕자는 건 말이 된다. 하지만 베짱이들을 돕자는 건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옥석 가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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