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최근 보도 등을 근거로 한국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협상의 기술’에 걸려들었다는 분석과 함께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위험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FT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15% 관세율에 합의한 27일(현지시간) ‘EU가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한 방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EU가 대미 보복관세를 중단한 지난 4월 10일을 "협상이라는 이름의 협박을 수용한 때"라고 규정했다.

미국은 지난 3월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자동차 수입에 25% 관세를 매기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4월 2일엔 EU에 대해 20%의 상호관세를 예고했다. 이에 글로벌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경기 침체 우려가 확산하면서 전 세계 주식 시장이 폭락하자 같은 달 9일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관세를 90일 유예하고 기본관세 10%만 부과하기로 했다.

이에 EU도 10일 25% 보복관세 부과 조치를 거둬들였다. FT는 이를 EU가 미국의 협박에 굴복한 것으로 본 것이다. FT는 한 외교 인사를 인용해 "다른 이와 함께 불량배인 그(트럼프)에 맞서지 않았다"며 "함께 매달리지 않으면 각개격파 당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중국과 손잡고 트럼프의 일방주의에 맞서지 않은 탓에 각개격파 당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FT는 "EU 기술 관료들이 ‘퀸즈베리 룰(현대 복싱의 기초가 되는 규칙)’에 따라 정통 복싱을 하던 사이, 트럼프는 뉴욕 거리에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고 비꼬았다. 트럼프가 전통적인 국제 규범이나 외교 관례 또는 통상 질서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였는데도 EU는 정도로만 갔다는 뜻이다.

프랑스도 협상 결과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협상 타결 하루 만인 28일(현지시간)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는 엑스(X:옛 트위터)에 "자유로운 국민의 연합이, 자신들의 가치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뭉친 그 공동체가 결국 굴복한 날로, 참으로 암울한 날"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방식을 보고 많은 이가 그의 저서 ‘협상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관되게 구사해 온 협상 방식은 ‘초기 강경 압박→위기 고조→상대의 양보 유도→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합의’라는 패턴을 따른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포 마케팅을 협상의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한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의 기술’에 걸려들었다는 분석은 여기에 기초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뚜렷한 이유나 설명 없이 세 번이나 한국 정부와의 약속을 파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월 17일 캐나다 앨버타주의 휴양도시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린 G7 정상회담 도중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간에 귀국해 버렸다. 이후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현지 정세 등을 이유로 일정을 취소했다.

이런 가운데 25일로 예정됐던 한미 경제·통상 분야의 ‘2+2 장관급 회의’가 23일 늦은 오후 돌연 취소됐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출국 직전 인천공항에서 이메일로 이 소식을 듣고 돌아서야 했다.

외교에서 이런 무례가 없다는 지적이 있으나 트럼프 행정부의 계산된 행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크다. 그러잖아도 다급한 한국 정부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어 최대한 양보를 끌어내려는 의도라는 이야기다.

정치권이나 외교가에서는 일본 및 EU와의 협상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둔 트럼프 대통령이 더욱 득의양양해져 한국의 관세 협상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예측이 힘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28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의 스코틀랜드 방문을 수행하는 동안 한국 당국자들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고 밝혀 파문을 낳았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스코틀랜드까지 러트닉 장관을 따라간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에 야권에서는 ‘스토킹 협상’으로 비친다며 그런 노력이 가상하지만 오히려 협상력을 떨어뜨릴 뿐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러트닉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수족일 뿐이고 키는 트럼프 대통령 손에 있음에도 러트닉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고자세만 부추길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재명 대통령이 관세 협상 국면에서 시종일관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모습을 보여 온 것이 우리 정부가 관세 협상 전망을 어둡게 보고 있다는 뜻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통령실은 "이 대통령이 수시로 관련 회의를 열고 보고도 실시간으로 받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으나 협상 결과가 뜻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수그러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