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국전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⑨ 우남의 포용과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원칙 수호

청산 운동은 권력 찬탈 위해 시작...스탈린도 청산 내세워 120만명 살해
한반도 해방·분단으로 혼란한 시절...1948년 에'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이승만 특경대 해산·공정 재판 조치...과거청산 내세운 역사적 비극 막아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 당시 이승만 건국 대통령.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우남은 자유와 인권을 소중히 여겼으며,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 원칙과 포용의 자세를 지켰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우남은 취임사에서 "사람이 사회 명예나 정당 단체의 세력이나 또 개인 사정상 관계로 나를 다 초월하고 오직 기능 있는 일군들과 함께 모여 앉아서 국회에서 정한 법률을 민의대로 진행해 나갈 그 사람끼리 모여서 한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분들을 물색하는 중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포용적 인사 단행을 천명했다. 우남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와 투쟁했으나 첫 내각에 조봉암과 이순탁 등 다양한 사람들을 중용했다.

조봉암은 1924년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조직했고, 1926년 상하이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로 활동하다가 체포된 조봉암은 1938년 출옥한 이후에도 계속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 조봉암은 해방 이후에도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했다. 이순탁은 1933년 연전 상과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으나 해방 이후 미군정부 입법회의 위원을 지냈다. 우남은 포용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과정을 이끌었다.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은 포용이었다.

◇ 청산 운동, 그 자체로 비극 만들어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결정주의적 역사관은 선동가들이 군중을 선동하거나 강단 좌익이 학생들을 현혹할 때 쓰는 말이다. 터무니없는 주장이 옳은 말로 여겨지곤 한다. 이런 말은 좌익들이 미국 문화원을 들어갈 때 떠들면 적합해 보인다. ‘대한민국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나라’라느니 ‘불의를 단절하지 못한 나라’라느니 하면서 우리 역사를 폄훼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역사의 진보’를 위해 청산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청산이란 말을 내놓으면서 권력 투쟁을 한다. 청산이 얼마나 위험한 이야기인지, 그리고 공산주의자가 이야기하는 과거 청산이 얼마나 큰 민족적 비극을 만들어내는지를 말하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포용으로 시작한 대한민국을 비극적 국가로 만들려는 이들이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모순적 현상이 일상화됐다.

청산은 언제나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했고 항상 비극적 역사를 만든다.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외부의 지원으로 증폭된다. 중국은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반군인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캄보디아의 협조가 필요했던 미국은 캄보디아 정부를 지원했다. 휴전협정을 맺은 미국이 캄보디아 정부에 대한 원조를 끊자 크메르 루주는 바로 정부를 몰락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의 달콤한 선전과는 달리 크메르 루주를 이끄는 폴 포트는 집권 후 과거 청산에 나섰다. 완전한 혁명을 위해 폴 포트는 무자비한 악행을 저질렀다. 청산으로 인해 100만~300만 명의 국민이 살해됐다는 이야기가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난 2019년 9월 중국 상하이 유명 사립 미술관인 룽(龍) 미술관에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여성 홍위병을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는 모습. /연합

마오쩌둥은 1966년 5월 16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란 이름으로 청산 운동을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지지자들은 다시 살아나는 전근대성 문화와 시장 정책 문화를 청산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는 운동을 표방했다. 이 청산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을 동원한 폭력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를 만회하고 자신의 재부상을 시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런 청산 운동을 주도했다. 여기에 편승한 민중들은 비극적 결과를 만들어냈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수십만에서 수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추정이 난무한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청산을 시도했다. 니콜라이 예조프가 주동한 소비에트 연방은 1937년에서 1938년까지 독일 나치에 협력하는 밀정들을 청산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농민과 소수 민족 등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공식 사망자 수는 68만 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120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도 있다. 수백만 명이 간첩이나 반체제 선동 혐의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고 고통을 받았다.

나치의 청산은 홀로코스트(Holocaust)로 잘 알려져 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당(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등을 학살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세상에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동하면서, 전 국민을 동원해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새로운 사회 건설, 민족주의, 반자본주의, 반유대주의 등 다양한 이유로 청산 운동이 시작됐다. 권력을 뺏기 위해, 그리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청산 운동이 시작된다. 청산 운동은 법치주의와는 거리가 먼 폭력 그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과거 청산 위해 기존 법 체제 초월해선 안돼

한반도에는 해방과 분단으로 혼란의 시절이 있었다. 소련의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38 이북은 공산화됐고, 38 이남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웠다. 소련의 테렌티 스티코프는 북한 지역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남로당을 통해 남한 지역의 총파업을 지시하는 등 남한의 혼란에 영향을 줬다. 남한은 소련의 사주를 받는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민주주의 세력 등으로 분열됐다. 1947년 6월 미군정 하에서 과도정부입법의원이 구성되고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간상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반민족 행위자를 숙청하려고 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무산됐다. 미군정은 소급입법에 의한 사후적 처벌이 초래할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36년의 국권 상실로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려는 의지는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됐고, 제헌헌법 부칙 제101조에 대한민국 건국 이전 발생한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만들고 9월 22일 우남이 공포했다.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 소급입법이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강화해야 한다는 찬성 의견이 많았다. 불행하게도 동 법이 단순히 민족정기와 불법 행위자를 처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없었다.

1948년 8월 19일 동 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일부 국회의원들은 ‘정부내 친일파숙청건의’를 통과시켰다. 동 법의 정치적 측면을 보여준다. 정부내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은 유진오 법제처장, 민희식 교통부장관과 임문환 상공부차관이었다. 유진오는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좌익 모임을 조직해 활동하고 졸업 후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수로 일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 교사로 일하고 후에 고려대학교 총장도 역임했다. 일정기 유진오는 ‘김강사와 T교수’ 등의 소설을 쓰는 등 활발한 문인 활동을 하면서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한다. 해방 후 사람들은 이를 빌미로 유진오를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민희식은 미국에서 유학했고, 192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들어가 3년간 일했다. 미군정에서는 운수부장으로 일했다. 역시 철도국의 일 때문에 친일파로 매도됐다. 임문환은 1935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재학 중인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일본의 관리로 활동했다. 일정기 관리로 일했다는 것이 친일파로 매도된 이유다. 이들은 능력이 뛰어났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할 의지도 있었다. 이들을 특별하게 처벌해야 할 악질적 반민족행위자로 보기도 어렵다. 이것으로 볼 때, 반민특위의 활동이 정치적 활동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문이 남는다.

우남은 1949년 1월 10일 반민법 발효에 따라 공정한 처리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한다. 우남은 반민법이 3권 분립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회가 행정부를 직접 통제해 조사하고, 심지어 사람들을 구금하고 고문까지 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우남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하에서 반민법 개정안을 만든다. 개정안에서는 단순히 일정기에 관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악질적 반민족 행위를 기준으로 처벌하는 것으로 바꿨다. 그러나 국회는 우남의 정부 개정안을 제1독회만 하고 부결시켰다. 국회는 반민법을 근거로 특경대를 설치하고, 특경대는 국가경찰도 아니면서 총기를 휴대하고 인신을 구속함으로써 경찰과 특경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국회의원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고 경찰 간부가 특경대에 체포됐다.

우남은 반민특위가 범인을 검거해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로 넘기도록 국회에 권고했으나, 국회는 직접 검거·심문하는 것을 고집함으로써 문제는 악화했다. 더욱이 특경대의 조사위원들이 사람을 가두고 긴 시일 심사하고 오히려 죄가 있다고 지적된 사람들은 조사하지 않으면서 뇌물까지 받고 다닌다는 소문이 무성해졌다. 이에 우남은 특경대를 해산한 뒤 체포, 구금, 심문 등의 행정사무는 행정부로 넘기고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조치했다. 우남이 아니었으면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역사의 비극이 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기존의 법 체제를 초월하는 법을 만들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적 법치주의는 인민의 뜻에 따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은 항상 통제돼야 한다. 반민법과 특경대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타당했는지도 의문이다. 민족정기를 정치에 악용하려는 세력, 그리고 대한민국의 분열을 획책하는 좌익 공산세력 등은 청산을 이야기하며 포용적 역사를 폄훼해왔다. 우남은 자칫 광기로 흐를 수 있었던 청산 운동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원칙에 따라 해결했다. 지금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은 우남의 포용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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