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흑백 세상...여전히 정의는 멀고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J.M.쿳시 소설 ‘추락’의 원제는 ‘치욕’(Disgrace)이다. 소설의 배경은 1994년, 남아프리카민족회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때이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이 극도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 백인교수와 그 딸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이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J.M.쿳시(John Maxwell Coetzee·85)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출생한 네덜란드계 백인 작가이다. ‘추락’은 쿳시에게 1999년 부커상을 안겨줬다. 이미 1983년 ‘마이클 K’로 부커상을 받았던 쿳시는 한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던 부커상의 관례를 깨고 최초로 2회 수상자가 됐다.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의 배경 남아프리카공화국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으로 유명한 국가였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권이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시행했던 극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이었다.
이 시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구를 인종별로 분류하고 거주지·교육·의료·고용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백인을 최상위 계층에 두고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을 하등한 인종으로 취급해 권리와 기회를 박탈했다.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했고 투표권·언론의 자유·집회의 자유 등 기본을 박탈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국제 사회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았으며, UN은 이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정치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수많은 인권 운동가들의 노력과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해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를 통해 완전히 폐지됐다.
추락해 버린 백인 교수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는 남아공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낭만주의 시를 가르치는 50대 백인 교수다. 그는 이혼한 홀아비로 성적 만족을 위해 정기적으로 매춘을 하지만, 도덕적 수치심 따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어느 날 제자와 성관계를 맺고, 그 사실이 당국에 적발되어 교수직에서 파면된다. 사회적 명예를 한순간 잃어버리고 ‘추락’한 것이다.
몰락한 그는 딸 루시가 운영하는 시골 농장으로 당분간 거처를 옮긴다. 농장에서 루시는 이웃에 사는 흑인들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지내는 듯이 보인다.
그런 어느 날 밤, 강도들의 습격을 당하고 루시는 강간까지 당한다. 데이비드는 흑인 범죄자들의 만행에 분노하며 치를 떨지만, 루시는 아버지와 달리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한편 가해자들을 고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거기다 이웃에 살고 있는 흑인 페트루스와의 결혼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 데이비드를 당황하게 만든다.
루시는 흑인 페트루스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말하는데, 데이비드는 이런 딸의 태도에 당황한다. 그는 딸의 계획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데이비드는 변화무쌍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적 환경과 사회 속에서 ‘추락’해 버린 자신을 성찰하며 깊은 고뇌 속으로 빠져든다.
치욕을 받아들이는 딸
소설 ‘추락’에서 주인공 데이비드의 추락과 그의 딸 루시의 집에서 겪은 강도 강간 사건에 따른 수치심은 과거 백인들이 남용했던 폭력과 대비된다.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 성공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백이 서로 뒤바뀌었고, 새로운 사회 질서 속에서 백인들의 상실감과 불안감은 극도로 고조됐다. 소설에 묘사된 흑인 강도들의 농장 습격 사건은 과거 억압받던 흑인들의 분노와 복수심의 표출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사회에서도 여전히 드러나는 인종 간의 긴장과 갈등을 상징한다.
또한 데이비드와 그의 딸 루시가 겪은 폭력에 대한 무력감은 과거 지배층이었던 백인들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소수자이며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 취약성을 암시한다. 루시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가해자들을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흑인 페트루스와의 결혼을 모색하는 것은, 변화된 권력 구조 속에서 백인들의 새로운 생존 방식에 대한 현실 반영이다.
매춘을 하고 제자와 성관계를 하지만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던 데이비드의 과거 행적과 딸이 겪는 현재의 고통은, 백인들이 저지른 역사적 죄악에 대한 집단적 가해와 수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또 이웃에 사는 흑인과의 결혼을 고려하는 루시의 선택은 전통적인 의미의 화해와는 거리가 멀 순 있지만 생존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공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뒤바뀐 가해자와 피해자
소설 결말에서 루시는 강간의 결과로 임신한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흑인 페트루스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이는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공존과 생존 방식을 모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루시의 이런 선택은 백인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과 충돌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인종 간의 불신과 갈등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작가 쿳시는 소설의 결말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확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고 말한다.
소설 ‘추락’은 한마디로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 성공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겪고 있는 변화와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데이비드와 그의 딸 루시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에 대처하는데, 그 모습은 독자들에게 진정한 구원과 화해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화해, 정의 실현은 없다
소설 ‘추락’은 흑백 간 권력의 이동, 인종 갈등, 과거의 죄책감, 화해라는 복잡한 주제들을 다층적으로 다루는 한편 소설의 재미도 잃지 않는다.
전직 교수 데이비드라는 인물, 다시 말해 백인 지식인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만큼 한계성도 뚜렷하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교육을 받고 특권적인 삶을 누렸던 백인이다. 변화된 사회 환경 속에서 중심을 잃은 채 혼란스러워하는 시각은 정치적 중립성을 잃는다는 한계성을 띨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의 생각과 감정 속에는 과거의 편견이나 오해가 있을 수 있고, 흑인 특유의 문화에 따른 언행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부정적 시선이 드러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특정 인종을 비난한다기보다는 몰락한 백인 지식인의 내면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소설은 전통적인 의미의 화해나 정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가해자들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상처를 여전히 껴안은 채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제시했던 모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 쿳시는 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역사적 잘못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에 관해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상처 또한 치유되지 않았다. 쿳시는 바로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