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생체 컴퓨터 등장
너도나도 쓰지 않는 사람이 없는 컴퓨터. 이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의 내장형 프로그램을 처음 고안한 이는 미국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가 폰 노이만이다. 폰 노이만은 1949년 에드삭(EDSAC)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이때 고안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다.
현실화된 폰 노이만의 꿈
폰 노이만은 처음 컴퓨터를 만들 때 CPU와 메모리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뇌를 모방하고 싶어 했다. 폰 노이만은 인간의 뇌야말로 컴퓨터 최적의 구조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류 크기를 조절하는 장치인 트랜지스터 같은 것들이 없었다.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메모리와 연산기를 분리해 만들어 현재의 컴퓨터가 된 것이다.
폰 노이만이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화되고 있다. 현재 CPU와 메모리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폰 노이만 구조를 깨뜨리면서 인간의 뇌처럼 작동하도록 만든 반도체가 등장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크로티컬 랩스(Crotical Labs)에서 만든 생체 컴퓨터이다.
인간 뇌는 AI보다 10만 배 효율
인류에게 금기시되는 기술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생명체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설을 따르든 진화설을 따르든, 인간의 구조가 가장 완벽에 가깝기에 그걸 모방하려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뇌를 흉내내기 위한 노력은 지금껏 중단된 적이 없다.
인간의 뇌는 전구 하나 켜는 데 필요한 수준인 단 20W 전력으로 1000억 개의 뉴런을 작동시킬 정도로 효율성이 대단하다. 데이터센터에서 AI를 돌리는 데 필요한 전력량이 평균적으로 연간 25GWh(기가와트시)이다. 25GWh는 4인 가구 6000세대가 연간 사용하는 전력량과 맞먹는다. 뇌와 AI의 데이터센터 단위를 비슷하게 맞춘다면, 뇌가 인공지능보다 1만 배에서 10만 배 또는 그 이상으로 효율적이다.
뉴런을 실리콘칩 위에 배양
크로티칼 랩스에서 발표한 것은 인간의 뇌를 흉내낸 것이 아니라 뉴런을 직접 활용한 것이다. 2022년 크로티칼 랩스 연구진은 SCI급(검증된 고등급) 저널인 ‘뉴런’(Nueron)을 통해 시험관에서 배양된 뉴런이 가상에서 게임을 하고 학습하며 자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연구는 합성 생체 지능( Synthetic Biological Intelligence)을 입증한 최초의 연구로 평가된다.
해당 연구팀이 연구에 박차를 가해 만든 것이 CL1이다. CL1은 전기적인 신호를 받으면 거기에 적응하고 반응을 내놓도록 설계되어 있다. 뉴런이 반도체 칩과 융합해서 뇌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현대 생명공학과 신경공학 기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크로티칼 랩스는 줄기세포를 이용했다. 줄기세포는 여러 종류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세포. 연구진은 혈액이나 피부세포를 줄기세포로 변환하고, 이 줄기세포를 뇌세포나 뉴런으로 변환시킨 뒤 컴퓨팅이나 인공지능처럼 활용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의 뉴런을 실리콘 칩 위에 배양해서 성장시킨 것이다.
그들이 판매하는 CL1에는 심장을 대신할 펌프와 신장 같은 여과장치도 있고 이산화탄소와 산소, 질소를 흡수하는 가스 믹서까지 달려 있다. 살아있는 뉴런이기 때문에 생명 유지장치도 함께 달려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뉴런이 전기 신호에 반응
이제 막 개발됐고,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된 제품이기 때문에 CL1을 통해 당장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AI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도 있다고 바라보고 있다. 완전히 새로운 컴퓨팅이 가능하고 데이터센터와 달리 엄청난 전력도 들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있다.
기존 AI는 트랜지스터 기반의 CPU와 GPU에서 뉴럴 네트워크를 소프트웨어로 시뮬레이션 했다면, CL1은 살아있는 뉴런이 전기적 신호에 따라 스스로 연결망을 형성하고 강화한다. 뉴럴 네트워크는 뇌의 작동 원리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수학적 알고리즘과 가상의 노드로 재현한 것인 반면, CL1은 실제 생체 신경세포가 가진 능력을 직접 이용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몇 배 빠르고 몇 배 더 효율적이라는 수치가 아직 나온 것은 아니다. 기존 AI에 비해 획기적인 성능 우위가 밝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연구팀은 CL1이 너무 빠르고 유연해서 챗GPT 같은 기존의 LLM(거대 언어모델)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되는 실리콘 기반 AI 칩을 완전히 능가한다고 말한다.
보통 실리콘 칩 기반 뉴로모픽(뉴런 형태를 모방한 회로) 기술은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결함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살아있는 뉴런은 스스로 연결망을 재구성할 수 있으니, 문제 상황에서도 스스로 오류를 줄이고 적응해가는 시스템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시한부 6개월 생체컴퓨터
CL1은 완전히 새로운 인공지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감각을 느끼고 인식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문제와 법적 규제가 동시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규제의 가이드라인에 저촉되고 생명윤리위원회 규제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혁신이 법률이나 규제보다 빨랐던 경우가 많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토스도 처음에는 불법이었다.
CL1은 공식적으로 최대 6개월 시한부다.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실험이고, 실제 인간이 아닌 배양된 세포라지만 6개월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최대 6개월 동안 내부 생명 유지 시스템을 통해 신경세포를 살아있게 유지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우선 문제는 가격이다. 연구팀은 3만5000달러에서 8만5000달러 정도로 판매한다고 한다. 5000만 원에서 1억3000만 원 사이다. 누가 6개월짜리 시한부 컴퓨터를 저 가격에 살까 싶지만,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용으로 사용되는 점과 초기제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가격이 되어야 다음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 다른 문제는 두려움일 것이다. 이 기술이 여러 커뮤니티에 소개됐을 때, 사람들은 생물학적 지능과 결합되는 하이브리드 AI에 혐오의 시선을 보냈다.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좋아하는 일론 머스크도, 파멸을 부를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으로 보는 입장이었다. 반면 구글의 창업주 래리 페이지는 새로운 진화의 단계인데 겁낼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파멸일까 진화일까
SF영화나 소설을 좋아하지만,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나 등장하는 생체 컴퓨터가 실제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필자로서도 당황스럽고 놀랍다. 부정적인 암흑 세계를 다룬 픽션에나 나올 기술이 현실에 등장하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현실이 더 무서울 수도 있겠다 싶다. 인류의 발전은 어느 방향이든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도 됐다.
이 생체 컴퓨팅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가든, 결국 기술의 진화 속도와 사회의 윤리적 합의 과정이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앞으로 CL1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역사의 한 장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가 말했듯 파멸의 시작일지, 래리 페이지가 말한 새로운 진화의 시작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