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일 CIA 비밀문건 한 건이 기밀 해제됐다. ‘단순 파괴공작 현장 매뉴얼’(Simple Sabotage Field Manual)이었다. CIA 전신인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윌리엄 도너번 국장(William J. Donovan)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월 17일 승인한, 본문 32페이지 분량의 소책자였다.
나치 세력에 대항하려는 레지스탕스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프랑스, 노르웨이 같은 나치 점령 국가 중심으로 활발히 일어나고 있던 시절이었다. 레지스탕스 활동은 정규군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저항 행위를 말한다. 전략정보국은 레지스탕스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단순 파괴공작 현장 매뉴얼’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레지스탕스들은 이 책을 통해 복잡한 도구나 특별한 훈련 없이도 적지에서 효과적인 파괴공작을 실행할 수 있었다.
아래는 ‘단순 파괴공작 현장 매뉴얼’에서 발췌한 것이다. 현대 조직에서도 여전히 비효율적인 조직문화로 간주되는 내용들이다. 조직·관리자·근로자 차원에서 효율적 의사결정을 파괴하는 기법 몇 가지를 소개한다.
먼저 조직 차원이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한다고 결재 라인을 무시하고 직접 보고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마라. 모든 논의는 ‘더 많은 연구와 고려’를 명분으로 위원회에 넘겨 오래 논의하게 만들어라. 위원회는 결코 다섯 명 이하로는 만들지 마라. 회의 때는 지난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반드시 다시 언급하고 그 결정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라. 자료는 항상 서면으로 요구하고, 회의와 무관한 문제도 수시로 제기하라. 회의 참석자들에게는 나중에 닥칠지 모르는 ‘당혹감’ ‘어려움’ 등을 상기시키면서, ‘상식’ ‘합리’ ‘신중’을 촉구하라. 회의록이나 결의안, 의사소통에 사용된 문구나 용어의 정확성에 시비를 따져라.
다음은 관리자 차원이다. 업무를 처리할 때는 중요하지 않은 업무부터 결재하고, 중요한 업무는 비효율적인 근로자에게 할당하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제품에 완벽을 요구하고, 작은 결함에도 보완을 지시하라. 비효율적인 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무능한 자를 승진시켜라. 그럴듯한 방법으로 서류작업을 늘리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세 명의 동의가 필요하게 만들어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회의를 소집하라.
마지막으로 근로자 차원이다. 결정이나 지시사항이 권한 내에 있는지, 상급 조직의 정책에 위배 되는 것은 아닌지 항상 문제를 제기하라. 상급자의 지시는 반드시 문서로 요구하고, 해결 방안이 없는 비현실적 문제로 논쟁하라. 일은 질질 끌고, 잘못되면 연장·기계·장비 탓으로 돌려라. 위험에 빠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불평과 논쟁을 조장하고, 기술이나 경험은 후배에게 전수하지 마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80년이 지난 매뉴얼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친숙하다. 더 이상 무능할 수 없을 때까지 승진하는 조직, 과도한 절차 준수, 불필요한 회의와 논쟁, 비효율적인 위원회 규정…조직을 교란하고 망치는데 ‘제임스 본드’급 파괴 공작원까지 필요 없다. 무능한 조직원이 승진하고, 효율적 의사결정 과정만 파괴돼도 조직은 저절로 망한다.
"의도적인 어리석음으로 모든 조직을 전복하는 시대를 초월한 가이드" "가장 건전한 사람조차 돌아버리게 만드는 시대를 초월한 전술" "그 스파이들의 후손이 우리 회사에 잠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파이의 모습이 무능한 직장인과 완벽하게 닮았네" "우리 회사 이야기…." CIA의 ‘단순 파괴공작 현장 매뉴얼’이 일반에 공개되자 전 세계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들이다. ‘스파이세계’ 독자 여러분들의 조직은 안녕하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