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는 특정한 상황과 관계에 따라 비교적 명확하게 정의(定義)될 수 있지만, 정의(正義)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주관적 해석이 가능하다. 의리는 특정 관계에서의 신뢰와 약속에 기반하므로 상대적으로 고정된 가치로 여겨지지만, 정의는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기준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신뢰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정의보다 의리에 가치를 더 두는 이유다.
1944년 11월 7일 일본 스가모 형무소, "세키군(赤軍, 적군), 고쿠사이 교산토(國際共産黨, 국제공산당), 소비에트!" 소련 스파이 조르게(Richard Sorge)의 처형당하기 직전 마지막 외침이었다. 일본은 세 차례에 걸쳐 스파이 교환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조국은 스파이를 배신했지만 스파이는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1965년 5월 18일 새벽 3시 30분 시리아 다마스커스 마르제 광장, 수천 명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Eli Cohen)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스파이는 조국을 향해 눈을 똑바로 뜬 채 죽겠다며 얼굴 가리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시리아로 잠입했습니다. 나의 동포, 나의 아내 그리고 세 아이의 장래를 위해. 내가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사형집행 전 엘리 코헨의 마지막 진술이다.
"나는 명령을 받았고 그것을 이행한 것이다. 나는 상관이 명령하면 그 대상이 설사 하나님이라 해도 쏜다. 나는 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한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1979년 10·26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의 최후 진술이다. 해병 대령 출신의 박 과장은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97년 10월, 울산에서 검거된 북한 스파이가 밤늦게 서울 국가안전기획부 본부로 압송됐다. "나는 조국 통일 사업을 위해 왔으며 김정일 장군님을 배신할 수 없다." 밤새 단 한마디 진술도 거부하던 여자 스파이는 다음 날 아침. 신체 은밀한 부분에 숨겨 두었던 독약앰플을 깨물고 자살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스파이로 선발됐던 그녀에겐 평양에 5살 난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남조선 혁명’을 뜻하는 ‘남혁’이었다. 28살 젊은 엄마는 스파이의 의리를 지키며 그렇게 죽었다.
1998년 어느 날 서울남부지방법원, "나는 권영해 부장님을 존경했고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 나는 권 부장님의 지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지금 똑같은 지시가 다시 내려와도 나는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조사했던 조선족 사업가 OOO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1997년 이른바 안기부 ‘북풍 사건’의 제일 말단에 있었던 30대 초반 6급 젊은 공작관의 최후 진술이었다. 방청석에 있던 나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이전 그 이후에도 일면식 없는 후배지만 그 후배를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숙연해진다.
연말 모임이 잦다. 만나면 당연히 비상계엄이 주된 화제다. "일은 개판을 치더라도 최소한 의리라도 있어야지! 내곡동에 근무했었다는 것이 창피하다." 동기생 한 명이 열을 올렸다. "우리 집사람은 어디 가서 사관학교 졸업했단 말은 하지 말라더라. 부끄럽다고 하더라." 사관학교를 졸업한 동기생이 열을 보탠다. "앞으로 단톡에 ‘우리 회사’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누군가 제안했다. 우린 앞으로 ‘그냥 그 회사’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