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연계된 해커들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등 미국의 저명 정치인들과 고위 공무원들의 휴대전화를 해킹하고 통화기록을 훔쳐갔다’, ‘이란 정보기관이 가짜 웹사이트와 링크드인(LinkedIn, 세계 최대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 프로필을 이용,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등 중동 국가의 항공우주·항공·방위산업 근무자들을 표적으로 해킹을 시도 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연합의 독자적 정보기관 창설을 제안했다.’
11월 초부터 보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보도된 스파이 관련 기사 중 몇 개를 꼽아봤다. "호전적인 대립상태는 항상 스파이들의 시간이다."(Warlike confrontations are always the hour of spies). 독일의 전 대외정보국(BND) 국장 게르하르트 쉰들러(Gerhard Schindler) 의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세계는 ‘스파이들의 시간’임에 틀림없다.
11월 13일 대한민국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적국’으로 제한됐던 간첩죄(형법 제98조)의 처벌 대상에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가 추가된 간첩법 개정안이 의결됐다. 1953년 간첩법이 제정되고 71년째,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개정되는 간첩법이다. 정쟁 속에 뒷전으로 밀리고 밀리다 결국 폐기되던 간첩법에 여야가 모처럼 합의를 끌어냈다. 법사위와 본회의 통과도 무난할 전망이다.
터키로 불렸던 튀르키예도 ‘국가기밀 침해 및 간첩행위에 대한 범죄’로 한정됐던 간첩죄(형법 제7조)의 대상에 ‘외국 또는 단체의 전략적 이익이나 지시에 따라 국가안보나 국내외 정치적 이익을 위협하는 행위’를 추가하는 간첩법 개정안이 10월 23일 의회 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깊어지던 올해 초, 이스탄불에서 모사드 간첩망이 적발된 게 직접적 이유였다. 개정 조항이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여론으로 법안의 국회 통과가 잠시 멈칫거리고 있으나, 개정 논의가 조만간 재개될 전망이다.
대만에서도 ‘적대적 외국 세력을 위해 조직 창설, 자금 지원, 접대, 조종, 지시 또는 발전시키는 것’으로 한정됐던 간첩법(국가보안법 제2조)에 ‘조직 활동에 참여하는 행동’을 추가하는 개정안이 11월 3일 의회에 제출됐다. 육군 대령 샹더언(向德恩)은 퇴역 군인에게 포섭돼 중국이 전쟁을 개시하면 바로 항복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매월 4만 대만달러(약 173만5000원)를 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어 2023년 2월 뇌물수수로만 처벌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필리핀에서도 한 시의원이 "외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영혼과 봉사를 팔아넘기는 동포들을 경계해야 한다"며 주로 전시에만 적용되는 간첩법(형법 제117조)을 평시에도 적용하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10월 21일 의회에 제출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갈등이 격화되고 있으며, 지난 9월 앨리스 궈(Alice Guo) 전 밤반(Bamban) 시장이 중국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면서 외국 간첩에 대한 경계심이 각별하게 고조되고 있는 시점이다.
냉전시대 이후 국제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간첩의 정의와 처벌 범위가 변화되고 있다. 미국의 경제간첩법(Economic Espionage Act)과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영국의 국가안전법(National Security Act), 중국의 반간첩법(反間諜法) 등 모두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지 않고 외국과 외국 단체까지 간첩으로 처벌하고 있다. 간첩법의 글로벌 표준이다. 우방국은 있어도 우호적인 간첩법은 없다. ‘스파이들의 시간’에 세계는 스파이법의 개정으로 대응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