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의 고공행진 속에서 조선·자동차·비철금속·배터리 등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업종은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반대로 유화·타이어 등 내수 비중이 높은 업종은 환차손으로 인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울상이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국 혼란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에 고착화하는 모습이다. 원·달러 환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1400원을 돌파한 뒤 1400원 초·중반을 횡보 중이다.
자동차업과 조선업이 대표적 고환율 수혜업종이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는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 국내 자동차업계 매출이 약 4000억 원 증가한다고 추정했다. 선박 건조 대금이나 운임을 달러로 받는 조선업도 마찬가지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국내 조선사들이 선별 수주하는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등 고부가선종은 원자재도 대부분 국산화했기 때문에 환율 인상에 따른 부담이 적다"며 "환헤징(환위험방지)이 없었던 1997년 외환위기(IMF)보다는 덜하지만 수혜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배터리 업계도 강달러로 인한 실적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 다만 국내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는 해외 생산 체제 및 투자 규모가 달라 온도 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LG에너지솔루션은 고환율에 따른 매출 및 영업이익 확대가 예상된다. LG에너지솔루션의 매출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90% 이상이다. KB증권은 지난 7월 보고서에서 달러당 환율이 10원 오를 때 LG에너지솔루션의 주당순이익(EPS)이 2%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경영권 분쟁 중인 고려아연도 고환율 수혜 종목으로 손꼽힌다. 아연 정광 등 원자재를 선물 거래로 수입하기 때문에 단기적인 환율 변동에 영향을 덜 받는 데다, 해외 매출 비중이 70%에 달하기 때문이다.
여행 업종도 영향을 받고 있다. 고환율이 지속되자, 연말 해외여행을 떠나려는 여행객들이 국내로 발길을 돌리는 분위기다. 마이리얼트립에 따르면 지난 4~10일 7일간 국내 숙소 신규 예약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2배 이상 늘어났다. 반면 같은 기간 해외 숙소 예약량은 5% 줄었다.
그러나 정유업계의 경우 연간 10억 배럴 이상의 원유를 해외에서 사들이면서 달러화로 결제하고 있다. 특히 내수 비중이 높은 업체일수록 타격이 클 것이란 분석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누계 매출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에쓰오일 45.4%, SK에너지 48.2%에 이른다. HD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의 경우 각각 22.5%, 25.8%로 상대적으로 내수 비중이 작다. 이들 국내 정유 4사는 올해 3분기 총 1조 5000억 원 안팎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는 등 실적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1400원을 넘은 고환율이라는 암초를 만나 위기감이 배가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업계는 원유 수입량이 제품 수출량보다 거의 2배 정도 많은 상황"이라며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증폭돼 환율 시장이 요동치면 업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타이어 업종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해외 판매 비중이 높은 타이어는 보통 고환율 수혜 업종으로 분류된다. 지난 3분기 매출에서 해외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타이어 90%, 금호타이어 84%, 넥센타이어 91%로 내수를 압도한다. 문제는 타이어 원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원재료 비용이다. 천연고무, 카본 블랙 등 주요 원재료를 해외에서 들여온다. 업계 관계자는 "비축 물량이 있어 당장 환율 상승에 따른 영향은 제한적이지만 고환율이 3개월 이상 지속되면 영업이익 감소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상 최대 실적을 노리고 있는 국내 타이어 3사는 남은 4분기 상황을 낙관하기 어렵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