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반짝' 빛났던 '여성국극'...그시절 스타의 성장기
정년이가 국극을 하는 tvN 드라마 ‘정년이’가 인기다. 방영 4회 만에 시청률이 12.7%까지 올랐고, 10월 TV-OTT 드라마 화제성 조사에서도 2주 연속 1위에 올랐다. ‘정년이’가 인기를 모으자 덩달아 국극에도 ‘알쓸신잡’ 수준으로 호기심이 몰리고 있다. 정년이의 소리를 타고 생소한 여성국극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시대극 웹툰 원작
‘정년이’의 원작은 시대극 웹툰(스토리 서이레, 작화 나몬)이다. 배경은 1950년대, 정확히는 6·25 전쟁 정전 협정 체결 3년 후인 1956년이다.
목포 저잣거리에서 언니(언니 정자 역 배우 오경화 연기가 좋다)와 함께 생선 팔아 가계 살림을 돕는 정년이는 유쾌 발랄하다. 그가 시원하게 내뿜는 소리 한 자락에 더불어 일하는 사람들은 고단함을 잊는다. 보석은 발굴되라고 묻혀 있는 법, 매란국극단 유명 남역 배우 문옥경(정은채)이 공연차 목포에 왔다가 정년의 재능을 발견한다. 옥경은 정연에게 소리 연기 발성을 가르친다. 어머니 채공선(문소리)이 소리는 절대 안되는 것이여, 헛간에 가뒀지만 언니 도움으로 탈출해 기어이 매란국극단 연습생이 된다. 돈 왕창 벌어 돌아오겠다는 정년이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 왜 전쟁 후 1956년인가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상에서 남자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전장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은 이들의 일상은 누가 책임지는가. 엄마로 대표되는 여성들이다. 6·25 전쟁 통에 그동안 남편이 주는 대로 먹고 살림하던 여자들이 경제 전선에 나선다.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해서 등에 업은 아이를 먹이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여자들은 경제생활을 하게 됐다.
여자들이 돈을 번다는 것은 가난한 와중에도 어쨌든 쥐발톱만한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한푼 두푼 모아 ‘구경’도 할 수 있다. 그 구경의 최고봉이 당시 인기있던 여성국극이었다. 여성국극은 유교적 틀을 교묘하게 벗겨냈다. 여자들만 나온다는 점, 남역도 여자가 함으로써 유교적으로 ‘면피’가 될 수 있었다. 여성국극은 전쟁이라는 상황에 지친 사람들을 판타지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성들이 꿈속에서도 뿌리쳤던 자유연애가 무대 위에 펼쳐졌다. 여배우와 여배우가 포옹을 하니 현실적인 죄의식도 없었다. 여성들이 가지기 시작한 경제력과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 찰나를 즐기려는 마음이 여성국극과 맞아 떨어졌다.
◇ 여장 남자 남장 여자
유교 문화가 만들어낸 일종의 기현상이 근대기에 있었다. 가극단 무대에는 남장 여배우가 아니라 여장 남배우가 섰다. 여배우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분칠하고 무대에 선다는 것은 여염집 규수로서는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몸집이 좀 작고 곱게 생긴 남자배우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 역을 했다. 여성국극의 정반대 지점인 것이다.
그래도 감독들이 여배우가 꼭 필요할 때 찾아가는 곳은 권번(기생집)이었다. 당시 기생 중 일부는예인(藝人)이기도 했다. 춤추고 소리하는 기량이 뛰어났다. 기생들은 문화의 전선에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문예부를 만들어 활동사진도 만들었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감독 이필우 각색·감독 영화 ‘낙양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무성영화 시대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 이월화·김정숙 등은 모두 기생 출신이었다. 그래서 60년대 영화 전성기에도 영화계를 ‘화류계’라 불렀다.
◇ 창극과 국극
판소리가 다양화 대중화되면서 발전한 것이 창극(唱劇)이다. 이미 1906-1907년 창극 공연이 이루어졌으며 기생이나 전통 예술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1930년대까지는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 공연을 전담해 왔다면 1940년 전후한 시점부터 문필가나 연극인들이 참여해 대본 있는 무대를 꾸몄다.
1950년대에 창극을 국극(國劇)이라 부른 것은 독립국가의 주체적인 양식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1950년대 여성국극은 연극계를 석권했다. 1954년에 한국 영화가 15편 제작됐던 데 비해 여성국극은 30편이 제작됐다.
하지만 레퍼토리가 빈곤하고 전통 연희에 숙련된 배우들의 부족으로 점차 매력을 잃어갔다. 게다가 영화의 대중화가 시작됐다. 멋있게 생긴 남자 스타, 청순 가련한 여자 스타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상영됐다. 60년대에 여성국극은 일거에 사라졌다. 이후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1962년 국립창극단이 창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최고 스타 임춘앵
‘정년이’ 1화에서 정년이와 함께 여성국극을 보러 가던 중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임춘앵이는 인자 한물 갔어야, 매란국극단 문옥경이 몰러?" 한다. 임춘앵은 여성국극 최고 스타였으며, 주로 남자 배역을 맡았다. 단 실제 임춘앵은 드라마 배경인 1950년대에 ‘한물 가지’ 않았다. 1960년대 초 여성국극이 쇠퇴기로 들어설 때까지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았다.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에 따르면 임춘앵이 손만 한 번 들어도 탄성이 터져나왔고 발걸음을 한 번만 내디뎌도 환호성을 울렸다. 부산 공연 때는 인근 도시에서까지 관객이 몰려들어 부산역 앞 공회당은 인파로 메워져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소문이 서울 장안까지 널리 퍼져 너도나도 그의 출연극 ‘해님 달님’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극장 문전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심지어 여성국극 단원이 되겠다고 몰래 집을 나온 여학생들이 많아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창극사연구>)
◇ 여성국극인 조영숙·이옥천
‘정년이’ 예고 방송에 여성국극 1세대 배우 조영숙, 2세대 배우 이옥천이 출연해 당시를 회고했다. 재담에 능한 조영숙은 ‘춘향전’의 방자 역을 많이 해 ‘삼마이’(일본 전통 연극 가부키에서 유래된 말, 웃음 담당 조연)로도 불렸다. 조영숙은 90세 나이에도 여성국극 ‘선화공주’를 변형 재구성한 ‘조 도깨비 영숙’을 지난 6월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렸다. 이옥천은 남자 주연 역으로 유명했다. 왕자면 왕자, 장수면 장수, 남역 간판스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정년이는 타고난 천재, 영서는 노력형이다. 정년이는 배운 것 없어도 타고난 목으로 노래는 부르고 영서는 무지무지 노력파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비견될 만하다.
현실적으로는 윤정년 역의 김태리, 허영서 역의 신예은(허영서)은 모두 이 앙다문 노력파다. 두 사람을 비롯한 주요 출연진은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판소리를 배웠다. 그래서 입만 벙긋 립싱크를 하는 것이 자신의 육성으로 시원하게 소리를 내뱉는다. 특히 주연을 맡은 김태리는 목포 사투리까지 열공했다.
남성 주역배우 역을 맡은 문옥경(정은채)과 여성 주역 서혜랑(김윤혜) 관계에는 아슬아슬한 질투가 서려 있다. 하지만 제작진은 드라마에 ‘퀴어 코드’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