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옥중에서 응답받은 이승만의 기도
하나님의 응답받은 이승만의 첫 기도
1899년 2월 (24살) 옥중에서 이뤄져
지위 높은 정치범 선비들 상대로 옥중전도,
제사 지내야 하는 당시 사회에서 혁명
콜레라 돌자 감옥에서 온몸 던지며 사역
24살, 권총으로 무장한 탈옥수를 다시 가둔 구한말 감옥은 죽음보다 더한 시련이었다. 이정식 교수가 2005년 출판한 책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배재대 출판부, 303-304 쪽) 은 이승만 스스로 영문으로 작성해 보관하고 있던 비망록 ‘감옥 이야기 일부’ (A Part of Prison Story) 를 번역해 다음과 같은 장면을 전한다. [ ] 속은 이정식 교수가 보완했다.
"7개월 동안 나는 10kg 쯤 무게가 나가는 나무로 만든 목걸이(칼: 수판 首板)를 목에 달고 두 손은 수갑에 채우고 발은 형틀(차꼬: 족가 足枷)에 끼워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다른 죄수들은 몰래 감옥으로 들여온 조간 신문에서 밤중에 내가 사형되었다는 보도를 눈문을 흘리면서 읽어 준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선친은 나의 시신이라도 찾아 매장하겠다며 오곤 했다."
그러나 모진 시련은 동시에 이승만을 종교적 구원의 길로 이끌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문이 이어지던 1899년 2월 어느 날 24살 이승만은 감옥에서 어렵게 구한 성경을 읽다 불현듯 겪게 된 영적 체험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유영익 교수가 2002년 펴낸 책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출판부, 60-61 쪽) 에 정리한 이승만의 또 다른 영문 비망록 "Mr. Rhee’s Story of His Imprisonment" 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 ] 속은 유영익 교수가 보완했다.
하나님의 응답받은 이승만의 옥중 기도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이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신학교(배재학당)에 다닐 때는 그 책이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이제 그것이 나에게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선교학교에서 어느 선교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옵소서. 오 하느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고 있던 증오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불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기들 스스로 대단히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옥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까지 이승만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평가와 태도는 다음 독백에서 잘 드러난다. 이승만의 또 다른 영문 비망록 "Rough Sketch"에 기초해 이정식 교수가 2005년 책 40쪽에 한글로 정리한 내용이다. 배재학당에 다니기 시작할 즈음인 1896년 4월, 21살 때의 고백으로 추정된다.
"나의 관심을 끄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1900년 전에 죽은 한 인간이 내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온갖 놀라운 일들을 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그런 우스꽝스러운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 그들은 자신들은 믿지 않으면서 무지한 사람들만 그런 것을 믿게 만들기 위해 여기에 왔을 거다. 그러니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만 교회에 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위대한 부처님의 진리와 공자님의 지혜를 공부해 학식을 갖춘 선비라면 저런 말은 절대 믿지 않는다."
쇠락하는 조선의 소중화(小中華) 대륙문명 ‘성리학’을 벗어 던지고 세계를 석권하는 해양문명 ‘개신교’로 세계관을 바꾼 이승만의 개종은 배재학당에서의 신학문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감옥에서 죽음과 다름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개종은 이 땅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거치는 개종과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가?
그의 개종에는 남다른 특징이 몇 가지 존재한다. 우선,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이승만의 기도는 이승만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기도는 ‘자신’은 물론 자신이 속한 ‘나라’도 같이 구원해 달라는 호소였다. 흔치 않은 모습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미 그때 그를 이 나라의 지도자로 예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이승만의 개종이 옥중에서 이루어지면서 드러난 특징이다. 이승만 재평가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는 전광훈 목사는 2015년 저서 『이승만의 분노』 (퓨리탄출판사, 45쪽) 에서 그가 "감옥 안의 죄수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기독교 교리를 알려주며 40여 명을 개종시켰다"고 지적한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몇 년을 노력해도 신도 1명을 얻기 어려운 상황임을 고려하면 놀라운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서 이승만의 영향으로 옥중에서 개종한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의 개종이 거의 ‘사회혁명’적 수준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제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감옥 선비들의 사회적 지위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들의 경력을 보자. ‘이원긍’은 법무차관, ‘이상재’는 의정부 차관보,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은 내무차관, ‘김정식’은 경찰청장, 이상재의 아들인 ‘이승린’은 부여군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정식 2015: 149). 더구나 이들은 모두 이승만보다 나이가 한참 위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사회를 개혁하려다 감옥에 온 정치범들이었다. 이승만은 ‘기독교를 썩어빠진 나라를 혁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옥중의 선비들에게 전파했고, 이들은 ‘나라의 비운과 개인적 좌절, 그리고 그 속에서 뚜렷한 한 가지 희망으로 번져오는 기독교에 대한 기대를 떨쳐 버릴 수 없어’ 개종했다 (서정민, 1988, "구한말 이승만의 활동과 기독교 (1875-1904)" 『한국기독교사연구』 no. 18: 4-23). ‘기독교 입국론’의 출발은 감옥에서 이루어졌다.
이승만이 개종한 후 보여준 기독교적 헌신은 그의 옥중 소식을 전한 1903년 5월호 『신학월보』에 잘 기록되어 있다. "우리 사랑하는 리승만 씨는 옥에 갇힌 지 이제 칠팔년(사실은 사년)인데 그 사이, 고생하는 중에 참아 견뎌낼뿐더러 옥중에 갇힌 사람에게 전도하여 아름다운 일을 행한 것이 많은데 그 대강의 기록을 다음에 기재하노라"는 도입으로 시작하는 ‘옥종전도’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드러낸다.
"작년 가을에 호열자(콜레라)가 옥중에 먼저 들어와 사오일 동안에 육십여 명을 목전에서 끌어내릴 새, 심할 때는 하루 열일곱 목숨이 앞에서 쓰러질 때는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시신과 함께 섞여 지냈으나, 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된 말씀을 가르치매 기쁨을 이기지 못함이라" (『언론인 이승만의 글 모음』 1995, 조선일보사, pp. 146-147).
낮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기독교인의 기쁨에 찬 사역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 줄 방법이 있을까? 120년이 지나 다시 ‘코로나’라는 전염병에 시달리는 지금 우리에게 더욱 돋보이는 모습이다.
<사진 설명>
1.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전도하는 모습을 담은 글 ‘옥중전도’가 실린 『신학월보』 1903년 5월호. 상단에 이승만 친필 메모.
2. ‘옥중전도’ 첫 페이지. "우리 사랑하는 형제 리승만 씨는 옥에 갇힌지..."라는 도입부 글이 보인다.
3. ‘옥중전도’가 실린 1903년 5월호 『신학월보』 영문 표지. 목차에 ‘The Work in the Seoul Prison’ 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