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감옥에서 벌어진 일들

셔먼 의사, 외교절차 어긋난 불법연행 항의
주시경이 탈옥 도우려 권총 밀반입시켜
한성감옥 중죄수 방에서 모진 고문 당해
자신도 모르게 올린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
김영선 감옥서장 정치범들에게 관대한 대우

류석춘
류석춘

이승만은 감옥에서 5년 7개월 복역했다. 1899년 1월 9일부터 1904년 8월 9일까지, 나이로 치면 24살부터 29살까지다. 누구에게라도 삶의 가장 황금 같은 시절인 20대 중후반의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이승만에겐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객관적인 사건의 전개를 우선 정리해 보자.

이승만 체포의 빌미를 제공한 미국인 의사 셔먼(Sherman)은 같은 의사 출신으로 주한 미국 공사가 된 알렌(Allen)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왕진에 나선 외국인 의사의 통역이었으니 체포하려면 사전에 해당 국가에 통보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즉 외교 절차를 무시한 불법 연행이라 주장했다.

알렌은 외교 경로를 통해 정식으로 항의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몇 주 동안 협상이 진행되면서 경무청의 미국인 고문관 스트리플링(Stripling)이 유치장을 방문해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는지도 확인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석방이 거의 성사되어 갈 즈음, 이승만은 배재학당 친구들과 엄청난 사고를 쳤다. 권총을 들고 탈옥하다 다시 잡혀 들어왔기 때문이다.

1903년 이승만의 옥중 동지들. 이승만은 중죄수라 포승줄에 묶여 있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 그리고 부친 대신 복역하는 어느 소년. (출처: 유영익, 1996, 『이승만의 삶과 꿈』 중앙일보사, p. 33)

‘건국이념보급회’ 대표 인보길은 당시 상황을 이승만에 대한 ‘판결문’과 ‘고종실록’ 등을 참고해 아래와 같이 재구성했다(뉴데일리 2013 5 24). 흥미진진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여기 인용한다. [ ] 속은 필자가 보완한 내용이다.

"이승만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간성 군수 ‘서상대’와 독립협회 동지 ‘최정식’과 같은 감방에서 울적한 나날을 보냈다...최정식은...어느날 ‘탈옥하자’는 권유를 이승만에게 먼저 꺼냈다...‘당신과 나는 민회(民會: 만민공동회)의 이름있는 사람인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려 하오?’ 한시바삐 뛰쳐나가 민중운동을 재개하고 싶었던 이승만은 즉시 호응하여 ‘다시 만민공동회를 모아 독립협회를 부흥하자’며 탈옥을 굳게 맹세하고, ‘주상호’(周商鎬)에게 권총을 부탁했다.

주상호는 뒷날 국어학자로 유명한 ‘주시경’(周時經)이다. 이승만과 고향(황해도 봉산)이 같고 한 살 아래인 주시경은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활동을 함께 한 평생동지다. 탈옥을 모의한 주시경은 이승만이 탈옥 후 진행할 대중집회도 준비하면서 권총 두 자루를 몰래 감방에 들여보냈다.

이승만, 최정식, 서상대 세 명은 1899년 1월 30일 저녁 때 감옥 문을 뛰쳐나가 서소문 쪽으로 달렸다. 최정식은 추격하는 순검들과 간수들에게 권총을 쏘며 배재학당 담을 넘어 도망쳤다. 감옥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뒤쳐진 이승만은 병사에게 잡히고 말았다. 최정식과 서상대는 양장한 여자로 변장하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칼을 뽑아 든 병정들에게 끌려간 이승만은 [1899년 2월 1일] ‘한성감옥’으로 이감되어 즉시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한성감옥은 종로 네거리 포도청(捕盜廳) 건너편에 있던 것으로 현재 영풍문고 빌딩 근처다. 3개월 후 최정식도 체포되었다. 평안도 진남포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밀항하려던 그는 여관 주인의 밀고로 잡혀서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이승만이 갇힌 방은 흙바닥의 중죄수 감방이었다. 그의 목에는 큰 칼이 씌워지고 손은 뒤로 묶이고 발에 차꼬가 채워졌다. 날마다 계속되는 고문은 잔혹했다. 무릎과 발목을 묶고 두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 두 사람이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엔 세모난 대나무를 끼워 살점이 떨어지도록 비틀었고, 이승만을 엎드려 놓고 대나무 몽둥이로 피가 철철 흐르도록 때렸다. 이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훗날 이승만은 손가락을 ‘후후’ 부는 버릇이 생겼다. [볼을 실룩이는 버릇도 같이 생겼다.]

...그는 자신이 사형당하리라 단정했다...이승만은 아버지에게 남기는 유서를 세 번 썼고, 아버지 이경선(李敬善)옹은 아들의 시체를 거둬 가려고 몇 차례나 감옥 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이승만이 열여섯 살 때 결혼한 박씨 부인은 고종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가지고 인화문 앞에 엎드려 남편을 살려달라고 사흘 밤낮이나 통곡했다. 아펜젤러, 알렌 등 미국 선교사들과 한규설 등 대신들도 이승만이 사형되지 않도록 구명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1899년 7월 11일 홍종우가 주재한 평리원 재판에서] 탈옥을 주도했던 [24살] 이승만은 종범(從犯)이 되고 최정식이 주범(主犯)으로 판결이 났다. 조사결과 최정식의 총탄은 간수의 다리를 맞혔지만, 이승만의 권총은 발사한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최정식은 사형을 당했고] 사형을 면한 이승만은 태형(笞刑)을 받고 종신 징역살이를 시작했다."

종신형 선고 대략 6개월 후인 1899년 12월 이승만은 ‘치하포’ 사건으로 ‘민간인’을 죽여 사형선고를 받은 김구(김창수) 등과 함께 특사를 받아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다. 이어서 1900년 2월 감옥의 책임자로 부임한 ‘김영선’은 정치범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허락하고 도서실도 설치해 주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옥중에서 신앙생활은 물론 독서와 집필도 할 수 있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민영환, 한규설 등의 노력으로 이승만은 마침내 특별사면을 받아 그해 8월 4일 29살의 나이에 석방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정말이지 지옥에서 천당까지 오가는 경험을 했다. 탈옥 후 잡혀 시작된 모진 고문은 결국 사형을 당할 거라는 지옥으로 이승만을 내몰았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올린 기도 끝에 이승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도 했다. 구원을 받은 기쁨은 감옥에서 죽어 나가는 콜레라 환자들을 맨몸으로 돌보는 모습에서 절정에 올랐다. 자신의 신앙 경험을 바탕으로 옥중에서 정치범들을 상대로 전도도 했다.

이승만 연구의 최고 전문가 중 하나인 유영익은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 출판부, 2002)에서 이승만의 옥중 활동을 다음과 같은 7가지로 분류해 정리한 바 있다. 1) 기독교 개종과 성경공부 및 전도, 2) 영어 공부와 독서, 3) 번역·저술 활동과 신문논설 집필, 4) 옥중학당 개설, 5) 서적실 개설, 6) 콜레라 환자 구호, 7) 붓글씨 연습과 한시 짓기. 이 연재물에서 이를 하나하나 세밀하게 살펴볼 여유는 없다.

다만 후일 독립운동의 지도자는 물론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이 된 후의 행보와 연관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몇몇 대목에 관해서는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승만의 건국 정신의 하나로 평가받는 ‘기독교 입국론’의 배경이 된 옥중 개종이다. 다음, 옥중에서 집필해서 독립운동과 건국의 방향을 예고한 원고들이다. 여기에는 당시 신문에 투고한 논설을 비롯해 후에 미국에서 출판한 ‘독립정신’과 ‘청일전기’ 등이 포함된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을 보내지 않고 또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후에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권총을 들고 탈옥을 결행하고 만민공동회에서 보부상과 싸우며 밤낮으로 집회를 이끌어 가는 모습을 근거로, 그도 ‘박용만’ 같은 무장투쟁 노선의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정식 2005: 220).

그러나 그가 겪었던 고통, 그 고통의 끝에서 경험한 종교적 구원, 그리고 이어진 지적 성취는 그를 전혀 새로운 길로 인도했다. 청년기에 빠지기 쉬운 과격한 방식의 개혁과 독립을 넘어서 그는 마침내 기독교 교육을 통해 인간을 근본부터 바꾸는 방식으로 개혁과 독립을 이루는 새로운 선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정식 20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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