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
황근

지난 10월 29일 베이 팡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adio Free Asia) CEO가 "미국 행정부가 예산 사용을 중단하면서, 설립 29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뉴스 콘텐츠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트럼프 취임 초 예산이 대폭 삭감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VOA)와 함께 USAGM(US Agency of Global Media) 산하 4개 방송 중 2개가 사실상 존폐 위기를 맞았다.

이 같은 예산 중단에 대해 법원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트럼프 정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로이스 램버스 지방법원 판사는 "트럼프 행정부가 USAGM과 VOA의 법적 의무를 가장 낮게 해석한 예비 금지 명령조차 준수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다. 이는 민사상 모욕죄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들 대외 방송들은 ‘법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존재와 기능’(minimum presence and function required by law)만 하면 된다는 신념이 확고하다. 또 대외 방송의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들 매체에 대한 세금 지원은 결국 돈 낭비라고 주장해왔다.

물론 이런 비판적 발언은 다분히 정치적 수사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이 대외 방송들이 무용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니 제5세대 인지전의 중요성이 점점 커가는 하이브리드전(hybrid warfare) 양상을 고려하면 어쩌면 잘못된 판단일 가능성이 더 높다.

러시아·중국·북한 같은 권위주의 체제(authoritarian regime) 국가들은 가짜뉴스 공세나 사이버전 같은 하이브리드 전략을 갈수록 더 강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공격 초기에 러시아 정부는 민간기업으로 위장한 IRA(International Research Agency) 같은 트롤 팜, 국제방송 러시아투데이, 스푸트니크 같은 통신사를 운영해 효과를 본 적이 있다. 이른바 ‘게라시모프 독트린’(Gerasimov doctrine)에 입각해 다양한 대외 매체들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소리를 비롯한 대외 방송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실제 자유아시아방송은 중국의 위구르족 인권 침해, 미얀마 군사 쿠테타 실상, 북한 인권 및 탈북자 관련 보도 등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 이는 권위주의 국가들의 가짜뉴스 같은 하드 파워(hard power) 공세에 정확한 정보를 통해 대응하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상징하는 매체라 할 수 있다.

소프트 파워 전략은 구소련과 공산 진영 붕괴 등에서 그 효과가 검증된 바 있다. 그러므로 트럼프 정부의 대외 방송 중단 조치는 수십 년간 이어 온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활용한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중국·러시아처럼 하드파워 국가로 전환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번 자유아시아방송 중단 조치가 미·중 정상 직후 단행됐고, 중국 정부가 크게 환영한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같은 미국의 전략 변화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반도는 중국·러시아·북한 같은 권위주의 체제 나라들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 국가들의 하드 파워 1차 공격 목표는 한국이고, 궁극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진영을 위협할 수 있다.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 국가들의 군사적·심리적 공격에 포위되어 있는 셈이다.

VOA에 이은 자유아시아방송 예산 중단 조치는 한반도에서 하이브리드 전략자산의 불균형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현재 한국 정부는 중국·북한 체제에 매우 유화적이다. 대북 심리전도 중단됐고 인접 국가들을 자극할 수 있는 행위를 강하게 억제하는 분위기다. 어찌 보면 하이브리드전의 한 축을 포기한 무방비 상태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의 하이브리드전 역량을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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