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보전해야 한다는 명분 뒤에 또다시 정치가 숨어들기 시작했다. 최근 세운4구역 재개발 논쟁은 단순히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앞 경관 훼손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 사실상 내년 서울시장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충돌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오래전부터 노후화한 세운상가 일대를 도심 복합문화축으로 재생하려는 전략을 펼쳐왔다. 서울 중심부의 활력을 회복하고, 종묘-세운-청계천-을지로로 이어지는 도시축을 ‘역사와 미래가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도시 경쟁력 관점에서도 이 방향성은 타당하다. 세계 주요 도시 가운데 노후 도심을 방치해 경쟁력을 잃은 사례는 많지만, 재생을 통해 새로운 관광과 창조산업의 중심이 된 사례는 훨씬 더 많다.
그런데도 논쟁의 흐름은 도시 계획의 논점을 벗어나 정치적 프레임 싸움으로 급전환되고 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직접 종묘를 찾아 ‘서울시의 일방적 추진’을 문제 삼았고, 그 과정에서 김건희 여사까지 거론하며 논쟁을 대중적 정치 이슈로 끌어올렸다.
설상가상 정부는 국가유산청장, 문체부장관까지 총투입해 이 사안을 ‘국가적 보존 대응’의 틀로 키우고 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은 ‘국가유산청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라’면서 개발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정부의 개입은 정책적 조정이라기보다는 명백한 정치적 포석으로 읽힌다. 이미 여권 내부에서는 김민석 총리가 내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종묘 대 세운상가’ 구도를 키우는 것은 사실상 오세훈 시장을 향한 정면 압박이자, 선거 프레임 선점에 가깝다.
더 문제적인 것은 정부가 갑자기 K-유산, K-관광이라는 생소한 표현을 들고 나오며 종묘 보존을 국가적 의제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인지도를 확보한 K-콘텐츠도 아닌 국가유산에 K접두어를 붙인 것은 급조된 정치 프레임일 뿐이다. 김 총리는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불릴 정도의 장엄미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과도한 국뽕처럼 들린다.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재생과 발전을 모두 봉쇄하는 것은 유산의 현재적 가치를 오히려 축소한다. 살아 있는 유산은 사람과 도시의 흐름 안에서 숨 쉬고 활용될 때 비로소 의미를 확장한다.
서울 중심부인 세운상가 일대의 재생은 종묘의 경관을 파괴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적 관점에서 문화유산을 재해석하고 미래로 확장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이를 정치적으로 왜곡해 ‘개발 폭주 대 역사 수호’ 구도만 반복한다면, 결국 종묘도 세운상가도 서울의 미래도 모두 선거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뿐이다.
문제는 도심 개발이 아니라, 개발을 악마화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다. 유산을 선거용 무기로 만드는 그 자체가 유산의 가치와 품격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