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형
이충형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 개발도상국에 부여되는 특별대우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특혜 포기를 선언했다. 그간 개도국 지위 남용을 지적하며 중국의 자발적 포기를 요구해왔던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위한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때인 2019년부터 중국이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무역 특혜를 받고 있다며 자발적 포기를 요구해왔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23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세계개발구상(GDI) 고위급 회의 연설에서 "현재와 미래의 모든 WTO 협상에서 더 이상 새로운 특별 및 차등 대우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에 "수년간 노고의 결실"이라며 "이 문제에 대한 중국의 리더십에 박수를 보낸다"고 화답했다.

리 총리의 발표 배경이 된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와 글로벌 거버넌스 이니셔티브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강조하고 있는 외교 노선 중 하나다. 중국 측은 이번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며 ‘일부 국가’가 잇따라 무역전쟁과 관세전쟁을 일으켜 다자무역체제를 심각하게 타격했다고 언급,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우회 비판했다.

중국은 하지만 중국의 개도국 지위와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다면서 관련 국가들과 개혁을 함께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개도국 관련 특혜는 사실상 포기하지만, 공식적인 ‘개도국 지위’는 유지하면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 통칭)의 좌장 역할은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WTO는 개도국에 규범 이행 유예와 무역 자유화 의무 완화, 기술·재정 지원, 농업·식량안보 등 일부 분야에 대한 보호 조치 등 특혜(SDT)를 제공하고 있다. 개도국 지위에 대한 공식적인 기준이나 정의는 없으며, 가입국의 자기 선언 방식으로 해당 지위를 가지게 된다.

한국은 1995년 WTO 가입 때 개도국으로 선언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탈퇴 압박 3개월여 만인 2019년 10월 WTO 가입 25년 만에 개도국 지위를 공식 포기했다. 당시 문재인 정권은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선전했다. 반면 중국은 "개도국 지위는 미국이나 일부 서방 언론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관련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이번에 중국이 6년 만에 미국의 요구에 부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개도국 지위 자체는 유지할 것이라고 선을 그은 만큼, 미국이 주장하는 WTO 개혁 드라이브에 실제로 얼마나 속도가 붙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일단 WTO 개혁 합의에서 미·중 간 쟁점이 됐던 걸림돌을 하나는 제거한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세계 2위 경제대국임에도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큰 개도국이라고 칭해왔다. 이번에 개도국 포기를 수용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실익을 놓치지 않으면서 다자주의 체제 수호를 외쳐온 대국으로서의 결단을 보여줘 국제적 이미지 또한 챙기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명분을 세워 실리를 챙기는 모양새다.

중국의 이번 발표가 실질적 효과를 불러오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의 웬디 커틀러 부회장은 블룸버그통신에 "WTO의 협상 어젠다가 부재하고 개혁 속도가 느린 점을 감안하면 중국 측 발표는 환영할 만하지만 실질적 효과를 낼 여지는 크지 않다"면서 "다만 중국이 다자무역체제 수호를 주장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중국 측의 이번 결정으로 인도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국가들에 대한 개도국 지위 포기 압박이 더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리창 총리가 GDI 고위급 회의에서 "현재와 미래의 모든 WTO 협상에서 더 이상 새로운 특별 및 차등 대우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한 발언이 트리거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중국의 이번 선언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속셈은 훤하게 보이고 미국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미국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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