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기억이 감정적 자극과 연관될 때 뇌가 해당 기억을 선택적으로 강화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는 치매 환자의 기억 소실 최소화, PTSD 환자를 위한 고통스런 기억 약화, 학생들의 학습효과 증진 등의 연구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티이미지
특정 기억이 감정적 자극과 연관될 때 뇌가 해당 기억을 선택적으로 강화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는 치매 환자의 기억 소실 최소화, PTSD 환자를 위한 고통스런 기억 약화, 학생들의 학습효과 증진 등의 연구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티이미지

왜 어떤 기억들은 평생토록 잊히지 않고, 어떤 기억들은 희미하거나 아예 사라져 버리는 걸까. 단순히 좋은 일과 나쁜 일, 혹은 독특한 경험과 평범한 경험의 차이일까. 미국 보스턴대학교 연구팀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치료법을 개선하거나 학생들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을 정확히 기억하는 학습효과 증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보스턴대학 로버트 라인하트 교수팀은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상적 순간의 기억이 중요한 사건, 즉 놀랍거나 보람 있거나 감정적인 충격을 주는 사건과 연결되면 추가적인 고착력이 부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도 감정과 연결되면 뇌의 ‘기억 강화’ 메커니즘이 발동되며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는 것이다.

라인하트 교수는 "기억은 단순한 수동적 기록 장치가 아니며, 뇌 스스로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한다"면서 "감정적 사건은 약한 기억을 고착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총 648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10개의 독립 연구를 수행했다. 참가자들에게 동물이나 도구 같은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일부 이미지에만 보상(현금 보너스)이나 전기 자극 같은 강렬한 자극을 함께 제공했다. 다음 날 예고 없이 기억력 테스트를 실시한 결과, 자극과 연결된 평범한 이미지를 훨씬 잘 기억해냈다.

기억 강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정 사건 이후에 일어난 기억이 강화되는 ‘선행(proactive) 강화’와 사건 이전의 기억이 강화되는 ‘소급(retroactive) 강화’가 그것이다. 이중 선행 강화는 감정적 자극이 강하고 오래 지속될수록 강하게 발현됐다. 여행 중 교통사고가 나면 사고 이후의 기억이 또렷해지는 것이 그 실례다.

특정 기억이 감정적 자극과 연관될 때 뇌가 해당 기억을 선택적으로 강화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는 치매 환자의 기억 소실 최소화, PTSD 환자를 위한 고통스런 기억 약화, 학생들의 학습효과 증진 등의 연구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티이미지
특정 기억이 감정적 자극과 연관될 때 뇌가 해당 기억을 선택적으로 강화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는 치매 환자의 기억 소실 최소화, PTSD 환자를 위한 고통스런 기억 약화, 학생들의 학습효과 증진 등의 연구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티이미지

반면 소급 강화는 감정 자극의 강도와는 관련이 없었다. 특정 사건과 그 이전의 일상적 사건이 시각적 유사성을 가질 때 강화됐다. 예컨대 교통사고를 낸 상대 차량의 색과 내 차에 앉아 있던 지인의 옷 색깔이 동일하면 소급 강화가 이뤄진다. 라인하트 교수는 "이는 뇌가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강화하는 ‘점진적 우선순위(graded prioritization)’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며 "뇌는 시간적 맥락에 따라 기억 강화에 다른 규칙을 적용한다"고 말했다.

논문의 제1저자인 리오 천양 린 박사과정생도 "이 결과는 처음으로 인간의 뇌가 약한 기억을 점진적으로 강화한다는 명확한 증거"며 "시점에 더해 중요한 사건과의 개념적 유사성도 기억 강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연구팀은 중요한 사건과 연결된 다른 기억이 이미 강한 감정적 무게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기억 강화 효과는 약해진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뇌는 원래 사라질 뻔한 취약한 기억을 우선적으로 살린다는 얘기다.

우리는 인생의 큰 사건, 이를테면 배우자를 만났을 때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를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그 전후의 평범한 순간까지 뇌가 특별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의 뇌는 단순한 과거 기록 장치라기보다는 미래의 학습과 적응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우는 복잡하고 능동적인 장치다. 이번 연구는 그 선택의 법칙을 한층 더 밝혀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특히 연구팀은 이번 발견이 뇌가 기억을 어떻게 저장하는지 기본 원리를 밝히는 이론적 가치에 더해 임상과 실제 응용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라인하트 교수는 "교육 현장에서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소재와 취약한 개념을 함께 제시하면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또 노화로 약해진 기억을 되살리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강화되지 않도록 활용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가 치매 환자의 기억 소실 최소화, PTSD 환자를 위한 고통스런 기억 약화, 학생들의 학습효과 증진 등의 연구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른쪽부터 연구팀의 로버트 라인하트 교수, 제1저자 리오 천양 린 박사과정생, 박사후연구원 웬웬. /보스턴대학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가 치매 환자의 기억 소실 최소화, PTSD 환자를 위한 고통스런 기억 약화, 학생들의 학습효과 증진 등의 연구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른쪽부터 연구팀의 로버트 라인하트 교수, 제1저자 리오 천양 린 박사과정생, 박사후연구원 웬웬. /보스턴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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