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
도명학

북한에서 친구들로부터 이런 충고를 받곤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으면 말 좀 조심하게. 속담에 서울 갈 당나귀는 발통부터 다르다는데 괜히 어쩌지도 못하면서 정치범수용소에 가고 싶나?"

여차하면 남한으로 도망가고 말겠다는 필자의 말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자존심에 "내 발통이 어째서? 가면 가는 거지. 그게 진짜 사내가 아닌가" 하며 받아치곤 했다.

필자는 남들이 함부로 꺼내지 못하는 말도 간부들에게 넌지시 건네는 정도여서 ‘모호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남한 라디오를 듣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남한방송은 본의 아니게 우연히 들었다 해도 정치범수용소에 갈 확률이 거의 100%였다. 다행히 사람 좋기로 소문난 당 간부의 보증이 있었기 망정이지 보위부원 손에 직접 잡혔으면 이미 생명은 끝났을지 모른다.

1997년에는 뜻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남한행을 목적으로 압록강에 들어섰다. 하지만 강을 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섰다.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렸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간절했지만 두고 가는 것에 대한 미련도 컸던 것 같다. 함께 떠났던 친구는 "역시 서울 갈 당나귀는 발통부터 다르다는 말이 맞아. 우린 안 되겠어"하고 푸념했다. 그날 그냥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지어먹은 마음 사흘 못 간다고 현실에 몸 담글수록 불의한 사회의 진모가 더 잘 보였다. 그런 필자가 간부들에게 골칫거리였다. 어느날 마을에 승용차 2대가 나타났다. 보위부원들이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 필자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목덜미를 가격하며 차 안에 구겨 박았다. 이쯤 되면 살 가망이 없었다. 감옥에서 죽든가,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 받다가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살렸다고 할지 긴 옥중생활 끝에 살아남았고 압록강을 건넜고 기필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물론 낯선 곳에 정착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다. 그때마다 북한에서의 악몽 같은 생활을 돌아봤다. "서울 갈 당나귀는 발통부터 다르다"며 나무라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러면 혼잣말로 "이 친구들아, 서울 갈 당나귀 발통은 내 발통이었어" 하고 되뇌었다.

그런데 요즘 새 통일부 장관이 탈북민 호칭을 북향민으로 바꾼대서 탈북민 사회가 시끌벅적하다. 탈북민이 남한에 자유롭게 이사온 사람들인가. 목숨 걸고 사선을 헤쳐온 탈북민을 한가로이 풀 뜯으며 이동해 온 방목지의 가축과 동일시하려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