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여동생 김여정이 지난 7월 28일 ‘조한(남북) 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다. 김여정의 담화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내놓은 첫 공식 입장이다. 김여정 담화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재명 정부가 우리의 관심을 끌고 국제적 각광을 받아보기 위해 아무리 동족 흉내를 피우며 온갖 정의로운 일을 다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어도,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 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조한 관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역사의 시계 초침은 되돌릴 수 없다"고 전제했다.
둘째, "이재명의 집권 50여 일만 조명해 보더라도 앞에서는 조선반도 긴장 완화요 조한 관계 개선이요 하는 귀맛 좋은 장설(長舌)을 늘어놓았지만, 한미동맹에 대한 맹신과 우리와의 대결 기도는 선임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셋째,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는 공식 입장을 다시금 명백히 밝힌다"고 강조했다.
요약하면, ‘한미동맹 맹신·(남북) 대결 기도’가 여전하다는 점에서 이재명 정부는 전임 정권과 다를 바 없으며, 따라서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김여정은, 대북 방송 중단을 ‘평가받을 만한 일이 못되’며, APEC회의 김정은 초청 가능성을 ‘헛된 망상’ 등으로 폄하했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이번 김여정 담화의 방점은 다음 발언에 있다. 김여정은 이재명 정부에 대해 "해체돼야 할 통일부의 정상화를 시대적 과제로 내세운 것을 볼 때, 흡수통일이라는 망령에 정신적으로 포로된 한국 정객의 본색은 절대로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1990년대 냉전 체제가 해체된 이후, 북한의 김씨 정권은 흡수통일을 극도로 경계해 왔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과 같은 흡수통일은 물론이고, 저들이 평화통일 방안으로 제시한 연방제-물론 위장 평화 공세이긴 하지만-에 의한 제도통일마저 거부하고 있다. 흡수통일이든 제도통일이든 모두가 평화적 방법에 따른 통일을 의미하는데, 이는 결국 김씨 정권의 종언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흡수통일(평화통일)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구체적으로 형성된 계기는 2018년 2월 김여정의 방한이라고 할 수 있다. 평창동계올림픽 참석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한 김여정은 2박3일 방한 기간 중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대한민국의 발전상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엄청난 차량의 홍수, 고층 빌딩 숲, 그리고 무엇보다 풍요와 자유를 만끽하는 시민들의 표정 등등…. 김여정은 아마도 두루미 초대를 받아 호리병에 담긴 음식을 대접받은 여우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김여정으로부터 대한민국 실상을 가감 없이 보고받은 김정은은 다음과 같은 결심을 재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은 결국 대한민국에 흡수되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에게 평화통일은 없다. 오로지 무력에 의한 영토 완정뿐이다.’ 김정은의 이 같은 심리가 드러난 것이, 이번 김여정의 담화에서 언급된 ‘흡수통일 망령’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정은 바라기’로 일관했던 문재인 정권이 저지른 대북정책의 최대 실수는-비록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김여정을 초청해 대한민국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대북 유화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해서는 안 될 소이연(所以然)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