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은 노무현·문재인 시절을 그대로 답습할 모양이다. 동일 정권-동일 정책 같은 느낌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북핵 문제의 정책 방향은 한반도 비핵화"라고 밝혔다.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다. "1단계는 핵·미사일 동결, 2단계는 축소, 3단계는 완전한 비핵화"라고 했다.
1991년 남북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있었다. 북한은 이를 어기고 핵보유국(nuclear power)이 됐다. 30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비핵화’란, 한국은 핵개발·전술핵 재배치 등 자체 핵무장을 못한다는 뜻이 되어 버렸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한 셈이다. 남은 건 한미 간 핵확장 억제가 유일한 북핵 방어책이다. 대한민국 5200만 국민이 임의의 시각에 김정은의 핵 협박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북한 체제를 존중하며, 북한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비방과 중상을 하지 않고, 북한 붕괴나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 장관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꺼내며 "정부의 대북정책은 평화와 공존을 제도화하는 것"이며, "평화로운 한반도, 동행하는 한반도를 위해 노력하자"고 한다.
이재명 정부가 시대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올해 2025년은 1991년 이후 34년이 지났다. 34년이면 거의 일제 식민지 기간이다. 국제정세는 1990년 탈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 등 두 번 바뀌었고, 지금 또 바뀌고 있다. 지난해엔 북·러간 신조약이 체결돼 북한군이 파병됐다.
북핵 문제, 북한 내부 사정, 국제 어젠다가 된 북한인권 이슈 등 그동안 바뀐 게 한 두가지 아니다. 1991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남북기본합의서가 아무리 ‘금과옥조’라 해도 34년간 바뀐 이 현실(de facto reality)을 어떻게 반영한다는 말인가.
지금 이 시기에 정부가 남북기본합의서·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들고 나온 배경에, ‘우리는 비핵화 약속을 지킬 테니 북쪽도 핵폐기하고 비핵화 약속 지켜라’는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도 김정은의 ‘적대적 2국’이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를 선언한 남북기본합의서대로 끌고 가자는 전략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고대 그리스의 격언처럼 ‘이미 흘러간 강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 20일 북한 김여정이 외무성에 가서 외무성 국장들에게 ‘한국 정부의 대북 유화공세’를 알린 의도 자체가 한국을 ‘외국’으로 상대하기 위한 조치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외무성이 다루면서 ‘적대적 2국 관계’를 객관화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세습독재정권 보존을 위해 향후 ‘동족이 아닌 이민족을 상대로 한 핵 협박’이 성립한다고 볼 것이다.
또 우리를 ‘외국’으로 취급해야 미국·일본과 상대하면서 한국을 따돌리는 데 용이해진다. 다시 말해, 향후 북한정권은 남북 대화를 애타게 원하는 이재명 정부를 ‘외교 채널’로 유도하고, 한국 정부의 달러 지원을 허락하면서, ‘남북 2국론’을 현실에서 기정사실화하는 데 이용하려 할 것이다. 결국 돈만 날리고 핵 협박당하면서 한국 내 통일 혐오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김여정이 무슨 허튼 짓을 하든,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이유는 없다. 지난 30여 년 북한은 남한 정부가 무슨 소리를 하든 핵을 만들고, 우리가 지원해준 달러를 챙기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날리면서 끝내 핵보유국이 되었다.
반면, 우리가 한 일은 3만4000여 탈북민들의 입국, 개미군단 인권단체들의 북한인권 이슈 세계화, 북한주민 정보 자유화와 대남 인식 개선, 영유아 취약계층 인도지원 등이다. 지난 30여 년 손에 잡히는 대북정책의 성과는 바로 이런 것이다.
향후 어느 시점에 트럼프와 김정은이 무슨 대화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대한민국 대북정책의 목표는 2400만 북한주민의 자유와 인권, 북한 체제 개혁개방이며, 이는 불변이다. 정 장관은 다시 한번 찬물에 세수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