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마다 새 역사 세계를 향한 도약

350년 역사 파리오페라발레단, 280년 전통 마린스키발레단의 공통점은? 바로 한국인 수석무용수를 지녔다는 점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안될 것 같은 종목이 스포츠에서는 피겨와 수영, 예술 쪽에서는 발레였다. 모두 체격조건이 우월한 서양인들 차지였다. 하지만 피겨는 김연아, 수영은 박태환이 그 벽을 깼다. 발레는? 지금 강력한 발레리나(노)들이 도장깨기에 나서고 있다. 전 세계 무용단에서 활약 중인 한국 무용수가 2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왼쪽부터) 박세은, 김기민, 전민철. /국립발레단 ,니콜라스 맥케이,  전민철 인스타그램
(왼쪽부터) 박세은, 김기민, 전민철. /국립발레단 ,니콜라스 맥케이,  전민철 인스타그램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별 박세은

박세은은 세계 5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에투알(프랑스어로 ‘별’, 수석무용수)이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1661년 루이 14세가 창설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발레단으로 유럽 고전주의 발레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연을 주로 한다.

박세은은 2007년 로잔국제발레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2012년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했다. 군무를 담당하는 코리페부터 시작해 2016년 최상위 솔리스트인 프리미에르 당쇠르로 승급했다. 무대 위에서의 절제미, 정교함과 감정 표현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아 2021년 동양인 최초로 주역무용수 에투알로 지명됐다. 150여 명 단원 중 에투알은 10명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발레단 350여 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여성 에투알이다.

2018년 무용계 최고 영예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를 수상했으며, 2023년 프랑스 문화부 슈발리에 훈장을 수훈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점프 김기민

김기민은 280년 전통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 2011년 입단해 2015년 동양인 최초로 ‘수석’ 타이틀을 거머쥔 세계 최정상급 무용수다. 270여 명 중 수석무용수는 단 13명에 불과하다. 2016년 김기민은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 남자무용수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김기민의 점프는 유독 높고 유려해서 ‘중력을 거스르는 자’, ‘플라잉 킴’으로 불린다. tvN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김기민은 "서양인에 견줘 신체 조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런 걸 보완하려고 점프를 하더라도 더 높이, 더 음악적으로, 더 가볍게 하려고 애쓴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독 리사이틀 무대도 두 차례 가졌다. 수석무용수라 해도 모두가 단독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티켓 판매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팬층이 탄탄해야 가능하다. 김기민 공연을 모두 관람할 정도로 그의 발레를 사랑하는 한 재력가 할머니 팬은 그에게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김기민과 박세은은 지난해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 공연으로 호흡을 맞췄는데, 당시 티켓은 3분 만에 매진됐다.

(왼쪽부터) 서희, 전준혁, 박윤재. /LG아트센터

네덜란드 최영규, 미국 서희, 영국 전준혁

2011년부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영규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발레를 시작, 30대 중반인 현재까지 한 길만 걸어왔다. 2016년 수석무용수에 오른 뒤 10년째 최고 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최초의 한국인 수석무용수 서희도 있다. 2005년 입단, 2012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해 ABT 대표 레퍼토리의 주역을 도맡고 있다.

전준혁은 영국 로열발레단의 퍼스트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2014년 로열발레단 부설 발레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은 최초의 동양인으로 2016년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에서 서희·김기민에 이어 한국 무용수 세 번째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2017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로열발레단에 입단했고, 지난해 6월 1년 만에 솔리스트에서 퍼스트 솔리스트로 파격 승급했다.

뉴 제네레이션 전민철·이윤주·박윤재

K-발레 라인은 신세대 전민철·이윤주·박윤재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빌리 엘리어트’로 불리며 어린 시절부터 화제가 된 전민철은 지난 17일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공연에서 남자주인공 솔로르 역으로 데뷔했다. 신인이 군무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솔리스트로 발탁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마린스키발레단은 비자 발급도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민철에게 게스트 아티스트 자격을 부여하며 주역을 맡겼다. 발레단 수석무용수인 김기민이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전민철은 2023년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파드되 부문 1위에 이어 올해 시니어 그랑프리까지 거머쥐었다. 21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발레계의 아이돌’로 불릴 만큼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전민철과 함께 한예종에 재학 중인 이윤주는 미국 휴스턴발레단 입단을 확정지었다. 미국 5대 발레단 중 하나로 정통 클래식 발레와 현대 안무가들과의 협업으로 유명하다.

16세 박윤재는 지난 2월 로잔국제발레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 5대 발레 콩쿠르로 인정받는 이 대회에서 한국 무용수가 우승한 것은 1985년 강수진, 2007년 박세은에 이어 세 번째이자 남자무용수로는 최초다. 

모든 것의 시작 강수진
한국 발레의 개척자 강수진. /국립발레단

해외 곳곳에서 활동 중인 수많은 한국 무용수들의 길 위에는 강수진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이정표처럼 새겨져 있다. 강수진은 한국 발레의 진정한 개척자다.

강수진은 1985년 로잔국제발레콩쿠르에서 한국 무용수 최초로 금상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한국 발레가 세계 수준에 올라설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강수진은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입단,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백조의 호수’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했다. 하루 몇 시간씩 피나는 연습을 해서 ‘강철 토슈즈’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997년 동양인 최초 수석무용수, 2007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가 수여하는 ‘캄머탠처린’(궁중무용가) 칭호를 받았다. 한국으로 치면 인간문화재 같은 영예다. 이후 종신단원 자격으로 활동하다 2016년 은퇴했다.

강수진은 2014~2022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을 맡아 시스템 정비, 무용수 처우 개선, 훈련 체계 개편 등을 통해 한국 발레의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현재는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별들이 온다 ‘파리오페라발레 에투알 갈라 2025’

2022, 2024년에 이은 세 번째 내한으로, 박세은을 비롯해 총 10명의 에투알이 함께한다. 이렇게 많은 에투알이 외부 무대에 동시에 서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박세은이 직접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캐스팅까지 총괄했다. 레퍼토리는 제롬 로빈스의 ‘인 더 나이트’,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전막 하이라이트, 모리스 베자르의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등이다. 7월 30일~8월 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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