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덕담은 설날 세배 풍속으로, 세배 자리에서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새해의 기원(祈願)으로 주시던, 덕(德)이 담긴 좋은 말씀이다. 덕담의 문화적 원형이 설날 덕담일 듯하다. 세뱃돈이라는 것도 세배 덕담에서 덕을 보충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생겨난 것일지 모르겠다.
요즘은 선의(善意)의 기원이 담긴 말들을 그냥 ‘덕담’ 범주에 넣는다. 이제는 ‘악담’(惡談)의 반대 개념 정도로도 쓰이는 말이 되기도 했다.
덕담은 화자 청자 모두에게 어떤 경건의 심회를 가다듬게 한다. 듣는 이는 삶의 포부나 태도에 긍정의 동기를 윗사람으로부터 얻는다. 덕담은 구체적 기원을 굳은 믿음의 방식으로 전한다. 그래서 덕담의 시제를 미래형으로 하지 않고 과거형으로 말하곤 했다. 결혼을 꿈꾸는 청년에게 "자네 마침내 결혼했네. 그리고 아버지가 되었네"라고 말하는 방식이 바로 그렇다.
그런 덕담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덕담이 존중되는 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의 격[人格]으로 맺어지는 사회이다. 인격(人格)이 물격(物格)처럼 다루어지는 사회에서는 덕담이 사라진다.
더 고약한 것은 덕담에서 덕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돈으로 맺어진다든지, 권력관계로 변질된다든지 하면, ‘가짜 덕담’이 횡행한다. 지나치게 비즈니스에 몰입하는 현대인들의 덕담도, 덕이 빠져나간 덕담이 되기 십상이다. 속임수를 가리기 위해 짐짓 덕담인 척 위장을 한다. 이런 것들이 무슨 괜찮은 처세술인 양 등장하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덕담의 가장 큰 적(敵)은 상투적 방식에 빠져버린 덕담이다. 요즘 표현대로 하면 ‘영혼이 없는 덕담’이다. 흔하디흔한 칭찬, 어떤 구체적 관심도 담기지 않은 막연한 덕담이 넘친다. 덕이 없는 덕담은 덕담이라 할 수 없다. 훼손되지 않은 순정한 덕담, 그걸 듣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