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듣기’(Active Listening)의 대표적 장면은 무엇일까? 시험에 나올 예상 문제를 짚어주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귀를 들이대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할까? 가장 적극적으로 듣겠다는 태도는 어떻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물음이 이렇다고 해서 ‘듣는 행위’만으로만 좁혀서 생각하면, 이 물음의 답을 찾아가기는 어렵다.그것은 ‘질문하기’다. 꼭 듣고야 말겠다는 태도가 구체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질문’이다. 그런데도, 질문은 어디까지나 말하는 행위이므로 듣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말하기와 듣기를 기계적
‘엿듣다’는 상대방 몰래 은밀하게 듣는 행위다. 엿듣다의 한자어는 ‘도청’(盜聽)이다. 도청이 기계나 기술적 장비를 이용한 몰래 듣기를 연상하게 한다면, 엿듣다는 벽 뒤에 숨어서, 안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를 맨귀로 몰래 듣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그러나 이 두 말은 다르지 않다. 이 두 말의 사용 맥락이 그렇다는 것이지, 엿듣다라는 말 안에는 ‘기계에 의한 도청’도 엄연히 포함된다.대부분의 ‘듣다’는 선하고 바른 인품을 기르는 데 순기능을 하는데, 유독 ‘엿듣다’는 그렇지 않다. 엿듣다에는 이미 나쁜 의도가 개입했거나, 장차 나쁜
학생들의 듣기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학교는 ‘듣기’를 가르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듣기를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듣기는 학교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지식 수용에만 교육의 목표를 집중하던 시기였으므로 ‘듣는 능력’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듣기 능력의 중요성을 교육이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교육의 실용적이고도 기능주의적인 진화를 의미했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에 듣기 문항 6개가 출제된 일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족한 사건이었다.학교가 듣기를 가르친다고 했지만, 학교 마음대로 정하지
한 분야에서 생겨난 특정의 말(용어)이 다른 분야로까지 확장되면서 그 말의 쓰임이 다변화한다면, 그 말은 시대의 생태와 맞는 어떤 의미 자질을 안으로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전략’(strategy)이란 말이 바로 그러하다.‘전략’은 본래 군사학에서 생긴 말이다. 큰 규모의 전쟁 수행과 관련한 대단위의 군사적 기획을 전략이라 했다. 그런데 오늘날 전략이라는 말은 군사학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 오래다. 경영학에서는 전략이란 말이 다반사로 등장한다. 행정학에서 ‘정책’은 ‘행정의 전략’이란 의미로 읽힌다.교육학도 전략의 홍수 속에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읽기나 쓰기는 가르칠 내용이 반듯하게 알차게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이에 비해 듣기는 좀 막연하다고 느낀다.한국어 못 알아듣는 한국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냥 귀만 열어 놓으면 들리기 마련 아닌가 생각한다. 외국어 듣기는 구체적 학습과 인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듣는 데 무슨 특별한 학습이 필요하겠는가 한다. 이는 듣기 능력(역량)이 어떻게 길러지는지에 대한 단견에서 나온 것이다.이런 오해는 듣기 교육을 지나치게 고립적으로 가두어 두고, 듣기 교육만을 배타적으로 다루려는 데서 생긴다. 듣기를
빗소리를 가장 서정적인 음향으로 들었던 건 어려서 함석집에 살 때였다. 자다가 들었는데, 함석지붕으로 떨어지던 빗소리는 반투명의 경쾌한 두들김의 음향이었다. 빗방울의 정령이 하늘에서 하강해 함석지붕에 부딪는 소리라고나 할까. 듣기는 귀로 듣지만, 내 감관 모두를 기분 좋은 텐션으로 일어서게 하는 소리였다.그 빗소리는 평화롭고 유쾌했다. 이 지붕은 비가 와도 든든함을 보증하는 소리 같았다. 빗소리에는 나를 지키는 안온함이 있었고, 그것은 포근한 행복감으로 이어졌다. 전쟁 후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하늘을 천막으로 가리고 사는 집도
인간의 행위 중에 긴장을 수반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서 어떤 효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긴장 없음’과 ‘의미 없음’은 같은 말이다.즐거움조차도 그것을 의미 있게 누리기 위해서는 적절한 긴장이 필요하다. 적절한 긴장을 ‘효능성’(Efficacyy)으로 대치하기도 하고, ‘생산적 긴장’(productive tension)이란 말이 등장하면서 긴장의 심리적·사회적 순기능에 주목하게 됐다.인간의 듣기 활동에도 긴장은 중요하다. 긴장이 사라진 대화 관계에서는, 듣기는 쓸쓸하고 말하기는 공허하다. 예컨대 두 연인이 여태껏 함께 걸어온
한숨은 길고 깊게 내쉬는 숨이다. 한숨을 듣고 그 곡절까지 짐작할 수 있는 자라면, 그는 생(生)의 심연을 헤아릴 수 있는 자이다.한숨 듣기는 경륜을 요청한다. 길게 살았다고만 해서 그의 한숨이 내게로 오지는 않는다. 한 줌의 한숨을 헤아리기 위해 독서도 필요하고, 여행도 중요하고, 봉사적 참여도 해야 한다.고단한 인생에서 한숨은 눈물과 동행하는 기호(記號)로 묶이지만, 그것의 해독(解讀)은 만만치 않다.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눈물이 마른 곳에 한숨이 터져 나오고, 한숨이 꺼진 뒤에 눈물이 흐르는 것, 그것이 인생 무대 아
북은 오래된 타악기다. 한자에서 ‘종’(鍾)이라는 글자를 ‘쇠북 종’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쇠로 만든 북’이라는 뜻이다. 종도 북의 일종이었음을, 북이 종 이전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북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다는 데서, 가죽을 제공하는 어떤 희생물의 존재를 함께 떠올릴 수 있다. 북소리는 가죽 막이 울리면서 나는 소리다. 가죽 막의 두께가 북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북을 악기로 분류하는 것은 인류 문명사에서는 후대의 일이다. 북은 악기 이전에 인류가 원시 부족 사회에서 수렵이나 전투를 수행하는 데 동원되는 사회적 도구
원래 덕담은 설날 세배 풍속으로, 세배 자리에서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새해의 기원(祈願)으로 주시던, 덕(德)이 담긴 좋은 말씀이다. 덕담의 문화적 원형이 설날 덕담일 듯하다. 세뱃돈이라는 것도 세배 덕담에서 덕을 보충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생겨난 것일지 모르겠다.요즘은 선의(善意)의 기원이 담긴 말들을 그냥 ‘덕담’ 범주에 넣는다. 이제는 ‘악담’(惡談)의 반대 개념 정도로도 쓰이는 말이 되기도 했다.덕담은 화자 청자 모두에게 어떤 경건의 심회를 가다듬게 한다. 듣는 이는 삶의 포부나 태도에 긍정의 동기를 윗사람으로부터 얻는다. 덕담
상대에게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물었더니 상대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이라고 대답한다. 있어 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넉 자의 한자 성어는, 무슨 그럴 듯한 고사(故事)가 들어 있는, 상상력 넘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도 아니다. 글자 그대로 ‘지금 처음 듣는 말’이라는 것이다.이런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까. "금시초문"이라는 답변에 엉겨 붙어 있는 숨은 맥락들을 살펴보아야 한다.듣는다는 일은, 더구나 잘 알아듣는다는 것은 고차방정식을 푸는 것만큼이나 헤아리고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다. 금시초문이라는 말이 오가는
도덕성의 관점에서 막말은 나쁘다. 오죽하면 막말을 했을까 하는 경우라도 막말은 나쁘다. 그 정황을 잠시 이해는 해 줄 수 있을지언정 그걸 잘했다고는 할 수 없다.도덕성을 따지기 전에, 실익 차원에서도 막말은 이득될 것이 없다. 막말은 우선 본인에게 확실한 해악으로 돌아간다. 본인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나 원래 이런 놈이었어!’ 하는 슬픈 자의식에 빠지게 한다.하나 더 있다. 내 막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오래 각인시킨다. 손익계산을 따지면 무조건 손해다. 잠시 짜릿하고, 긴 우울에
고전 반열에 든 대중가요로 ‘갈대의 순정’이란 노래가 있다. 묵직한 저음의 가수 박일남이 불러서 50년 넘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노래다.앞머리 가사 두 줄은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으로 되어 있다. 노래가 품고 있는 마음 사정이 이 두 줄에 다 드러난다. 내가 너를 연모하여 그리위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이 세상 누구도 모른다. 그런 내용이다.사랑 노래 대부분은 ‘너는 내 마음 모를 거야’라는 정서에 기대고 있다. 순정물 TV 드라마들 대다수도 대중의 사랑 정서를 관통하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종남산 아래 시골 고택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낮부터 부슬부슬 몰려다니던 안개비는 저녁 무렵에는 산자락으로 퍼져 올라간다. 자욱한 운무(雲霧)가 산마루를 가리는가 했더니, 어둠이 스미자 빗줄기가 되어 내린다. 산골에 들었으니 물 먹은 듯 빛나는 밤 하늘의 별을 보려던 기대는 사라진다.고택 마루에 나와 앉아 별빛 대신 어둠 속 빗소리를 본다. 순간 개구리떼 우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그저 몇 마리 정도인가 했더니 금방 수백 수천의 개구리가 거대한 어울림으로 합창을 한다. 소리 자체는 맑고 투명하다.
딕션(Diction)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이 말이 등장하는 두 가지 용례를 보자. "오늘 김 팀장이 간부회의에서 했던 프레젠테이션은 성공이야. 내용도 좋았지만 김 팀장의 딕션이 얼마나 명료하고 반듯했는지 말이야." "박 아무개 배우 말이야, 연기는 좋은데 대사가 흐려요. 딕션이 분명하지 않으니까 연기가 살아나지 못해요." 딕션은 발음이란 뜻일까.딕션을 발음인 줄로만 아는 건 딕션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이다. 딕션은 구두 언어를 구사할 때 발음뿐만 아니라 억양과 어조, 강세 등을 발화(發話)에서 모두 실현해 내는, 대단히 종
최고의 남성 트롯 가수를 뽑는 모 방송사의 ‘미스터 트롯’ 프로그램에 국악 가수 출신인 김준수 가 ‘대동강 편지’를 불렀다. 김준수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심사위원인 가수 주현미가 어떤 대목에서 귀곡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평했다. 대단한 찬상(讚賞)의 평이 아닐 수 없다.그러면서 주현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어떤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평생 국악을 해 오신 어르신 선생님들이 해 주신 말씀을 이렇게 기억했다. "자네는 대중가요 가수인데, 노랫소리 안에 귀곡성(鬼哭聲)이 들린다."귀곡성, 글자 뜻 그대로 귀신이 곡(哭)하며 우는 소리다
강연 또는 대화에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하는 걸 본다. 이 표현은 영어 표현 "As you know~"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한문투 표현으로는 "주지(周知/두루 아시는)하시는 바와 같이"라는 표현이 있다.개인적 스피치 습관이라기에는 너무 널리 퍼져 있어서 상투어처럼 됐다. 청자들에게 부정 효과를 줄 수 있어서 권장할 습관은 아니다.물론 긍정의 효과도 있다. 주제(topic)를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고 심리적으로 연대한다는 걸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 그거 나도 잘 알고 있지, 당신이 그걸 말한다니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속언(俗諺)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다. 쫀쫀한 형식 논리로는 쉽사리 변증하지 못하는 그 어떤 지혜를 우리에게 바로 들이민다. 인류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이 푹 우려져서 나온 ‘통찰의 언어’라 할 수 있다.그래서 속담·속언에는 인류학적 가치와 자산이 숨어 있다. 그만큼 종족과 지역을 관통해, 그 공감역(共感域)이 넓고 크다.모든 말의 학습은 발달론적으로 ‘말하기’보다 ‘듣기’가 먼저다. 아기들도 듣기를 먼저 익히고 그것을 말하기로 전이한다. 속담·속언도 그걸 말할 줄 아는 능력 이전에 잘 듣고 새
만류(挽留)는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붙잡아 말린다는 뜻의 한자어다. 잡아당긴다는 뜻의 한자 ‘만’(挽)과 머물게 한다는 뜻의 한자 ‘류’(留)가 합해진 말이다. 직역하면, 그 누군가를 붙잡아 당겨서, 그가 나아가지 않도록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비슷한 말에 제지(制止)가 있다. 같은 말인 듯싶지만 두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좀 다르다.만류는 모종의 간곡한 충정(衷情)의 정조가 숨어서 우러나는 말림이다. ‘만류하다’를 영어로 찾으면 dissuade나 discourage로 나온다. 이를 다시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면 ‘충고
잘생긴 이성을 만나서 보자마자 매력을 느꼈는데,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애초의 매력은 조용히 빠져나가고 말더라. 돈을 빌려 달라는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는데, 상대가 찾아와 설득하는 말을 들으니빌려주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겨나더라. 자기 학설을 주장하는 교수의 말이 너무도 논리적으로 명료하여 푹 빠져들었는데,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무언가 현실감이 떨어지는 듯해서 살짝 속은 느낌이 들더라.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일상에서 일어난다. 위의 사람들은 왜 처음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을까. 왜 거절 마인드가 수용 마인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