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9일 오후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에서 수미 테리 미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연합
지난 5월 29일 오후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에서 수미 테리 미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연합

미 연방검찰이 지난 16일(이하 현지시간) 수미 테리 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을 기소했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수미 테리’에게 적용한 혐의는 ‘외국정부대리인’으로 등록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위해서 일했다는 것이다. 1996년 9월 일어난 로버트김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대세가 된 상황에서 판을 뒤집기 위한 바이든 정부의 의도가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 실향민 외조부모와 살았던 수미 테리 박사…19년 간 정보기관서 근무

수미 테리 박사는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이후 버지니아에서 모친, 외조부모와 함께 지냈는데 실향민인 외조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테리 박사는 터프츠대 국제관계 전문대학원 플레쳐 스쿨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했다. 부시 정부 때인 2008~2009년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동아시아 국장으로 일했다. 오바마 정부 때부터 2019년까지는 미 국가정보국장실(ODNI) 부국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민간인이 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우드로윌슨센터, 미 외교협회(CFR) 등 싱크탱크에서 국장급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런 그가 2013년부터 미국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된 국가정보원 직원들과 접촉하면서 선물과 향응을 제공받고, 미국의 비공개 정보를 넘겨주거나 한미 정부 고위관계자들 모임을 주선했다는 것이 미 연방검찰의 기소장에 실린 내용이다.

◇ 국내 언론, 국정원이 테리 박사에 제공한 고가 선물과 향응에만 주목

국내 언론들은 미 연방검찰이 공개한 31쪽짜리 기소장 내용 가운데 국정원 요원들이 테리 박사에게 명품과 식사 접대 등을 했다는 점과 미국 방첩기관에 노출됐다는 점에 집중하고 있다.

미 연방검찰 기소장에 따르면, 국정원 요원은 2019년 11월 13일 테리 박사에게 2845달러짜리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사줬다. 테리 박사는 이 코트를 반품한 뒤 1300달러가량 더 비싼 크리스찬디올 코트를 사면서 차액을 자기 돈으로 지불했다. 이 요원은 같은 날 2950달러짜리 보테가 베네타 가방을 사서 테리 박사에게 줬다.

2020년 8월에는 미 정부 인사들이 참여한 화상워크숍을 주선해준데 대한 보답으로 3450달러짜리 핸드백을 사줬다. 2021년 4월에는 3450달러짜리 루이비통 핸드백을 사준 뒤 스시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이게 국내 언론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미 연방검찰은 "테리 박사는 자신이 일하는 싱크탱크 운영비용 등으로 3만 7000달러를 국정원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기소장에 나온 코트·가방 가격을 합하면 1만 2695달러다. 여기에 싱크탱크 운영비까지 더하면 4만9695달러, 우리 돈 약 6900만 원이다.

테리 박사가 대가로 해준 건 미 정부의 대북정책 관련 비공개 메모를 전달하거나 미 정부 관계자나 전문가와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테리 박사가 한국 정부에 미 정부의 기밀을 넘기거나 미 정부 정책이 바뀌도록 도왔다는 내용은 기소장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테리 박사가 만난 국정원 요원은 주뉴욕 유엔대표부 공사다. ‘화이트’라 부르는 공개 요원이다. ‘화이트’는 보통 외교관 신분인데 상대국 방첩기관과 정보기관에 통보하는 게 관례다. 테리 박사는 이 요원과 2013~2016년까지 교류했다. 박근혜 정부 때다. FBI가 문제 삼은 활동은 2019년부터 2022년 상반기까지다.

2020년 8월 뉴욕 맨해튼 소재 고급식당에서 수미 테리 박사가 국정원 요원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미 연방검찰이 기소장에 실었다. /미 연방검찰 기소장 캡처
2020년 8월 뉴욕 맨해튼 소재 고급식당에서 수미 테리 박사가 국정원 요원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미 연방검찰이 기소장에 실었다. /미 연방검찰 기소장 캡처

◇ 미 연방검찰 문제삼은 테리 박사와 국정원 요원 접촉 시기는 문재인 정부 시절

이런 맥락 때문에 정보전문가들은 "미 당국이 테리 박사를 기소한 데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테리 박사가 올해 5월 ‘제주포럼’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을 전제로 한국 독자 핵무장에 대해 이야기한 점을 지적한 전문가도 있고,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 대미 공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전문가도 있다.

테리 박사는 지난 5월 29일 ‘제주포럼’에서 "워싱턴에서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에 있어서도 모든 옵션이 다 가능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트럼프 정부 2기에서 외교안보 고문으로 활동한다면 핵무기 등을 한국이 독자적으로 무장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피력했다. 하지만 당시 테리 박사만 이런 의견을 낸 건 아니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특사 또한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의 대미 공작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에 대한 근거는 17일부터 나오고 있다. 2019년 1월 서훈 당시 국정원장이 방미 했을 때 미 정부 고위당국자들과의 만남을 테리 박사가 주선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국정원 직원이 테리 박사에게 고가의 선물을 제공한 시점이 모두 문재인 정부 때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중국과의 관계에 집착하면서 미 의회를 움직여 ‘한반도 평화법안’을 통과시키려 수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들여 로비를 한 사실은 이미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다. 미북 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강제하는 내용을 담은 ‘한반도 평화법안’은 한미동맹 해체법안이다.

지난해 말 김규현 국정원장 경질 및 국정원 인사파동과 관련해 김기삼 변호사는 올해 초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 때 ‘대미 영향력 공작’에 관여한 사람들이 현 정부에서도 활개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공작에 연루된 사람들이 테리 박사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18일 언론과 만나 "국정원을 감찰이나 문책하라는 소리가 있는데 감찰은 문재인 정권에 대해서 해야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테리 박사와 국정원 요원의) 사진이 찍힌 게 모두 문재인 정권 때 일"이라며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재인 정부가) 정권을 잡고, 국정원을 구성하면서 전문적인 외교 요원을 다 쳐내고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로 채워서 그런 일이 터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미 연방검찰이 테리 박사를 기소한 혐의도 중요하다. ‘외국정부대리인등록법(FARA)’은 외국 정부나 정당을 위해 일하는 개인·기관은 미 법무부에 신고 후 활동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고를 하지 않으면 신고를 강제한다. 실제로 미 법무부는 트럼프 정부 시절 중국 공산당 기관지와 관영매체에게, 바이든 정부 때는 홍콩의 친중매체에게 외국정부대리인 등록을 강제했다.

하지만 미 법무부는 테리 박사를 바로 체포·기소했다. 일부 정보전문가는 미국인이 한국 좌파 정권을 도우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시범 케이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크리스티 M. 커티스 FBI 부국장 대행이 보도자료에서 "FBI는 외국 스파이와 협력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든지 끝까지 추적·체포할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라고 강조한 점도 이런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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