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안내 방송이 나오고 연극의 막이 오른다. 무대와 음악 그리고 배우와 대사. 극의 시작과 함께 관객은 무대 위 세상에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배우가 퇴장하고 장면이 전환되는 사이, 어둠 속에서 극의 초반부를 곱씹으며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해 생각한다. 바로 이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관객석으로 빛이 새들어오고, 일군의 무리가 좁은 좌석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들로 인해 극에 한껏 이입했던 감정이 산산조각난다.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들, 바로 ‘지연 입장 관객’이다.

관람료를 지불하고 제시간에 입장한 관객은 공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어떠한 방해도 없이 온전히 공연을 누릴 권리가 있다. 공연 시작 시각은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모두가 약속한 시각이다. 그러므로 이를 지키지 않은 자는 공연을 누릴 권리가 제한되거나 없어진다. 당연한 이야기다. 지각 관객은 이 간단한 원리조차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고, 지연 입장은 약속을 지킨 관객의 공연 관람을 방해하는 위해 행위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소수 때문에 약속을 지킨 다수의 권리가 침해된다. 즉 그 존재 자체가 죄인이고 행위 자체가 폐다.

여기서 한술 더 뜨는 후안무치들이 있다. 대학로 소극장들은 관객석이 비좁다. 그래서 지연 관객을 위해 입구와 가까운 쪽에 지연 입장 관객용 좌석을 비워둔다. 극의 초반 장면 전환이나 암전 때 하우스 매니저가 암막을 단단히 치고 문을 살짝 열어 최대한 조용히 지연 관객과 함께 입장한다. 그리고 작은 손전등으로 지연 입장용 좌석을 안내한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소음과 빛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미 입장한 관객들과 무대 위 배우들의 집중을 깨뜨린다.

그런데 무대가 멀다는 이유로 또는 예매했던 앞좌석에 앉겠다는 의지로 객석 통로를 성큼성큼 내려와 이미 착석한 관객들의 무릎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꼴불견들이 있다. 피해를 줬으면 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기본 교양이 없는 자들에게 이런 태도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아니, 이 정도면 교양을 넘어 지능이 의심되는 수준이다. 제시간에 입장한 관객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왜 약속을 지킨 관객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지연 입장 관객들 때문에 피해를 봐야 하는가?

지연 입장 관객의 뻔뻔한 심리는 늦었지만 공연은 보고 싶다는 이기심과 못 보게 되면 투자한 내 시간과 돈을 날린다는 치졸함이다. 내 시간, 내 돈 아까운 줄 안다면 타인의 시간과 돈도 아까운 줄 알아야 한다. 지연 입장으로 어수선한 시간이 1분 남짓이지만, 약속 시간을 지킨 100명에게 피해를 주므로 100분의 시간을 강탈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시간은 돈보다 귀한 가치다. 자신의 약속 불이행과 무교양으로 100명에게 입힌 100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라.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남에게 선의를 베풀어라’로 요약되는 쇼펜하우어의 ‘도덕론’이 생각난다. 지연 입장 관객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 때문에 여유로운 교양인이 베풀기를 꺼려한다. 이는 비단 공연장 문화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성숙한 관람 문화를 위해 공연 입장 시간에 절대 늦지 말자. 공연장에 여유롭게 도착해 차분한 상태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감상에 훨씬 좋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었을 경우에는 하우스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최대한 몸을 숙이고 조용히 지연 입장용 좌석에 앉아 관람하자. 지연 입장 시간마저 놓쳤다면 인터미션 때 입장해야 한다. 그리고 인터미션이 없는 공연이라면 미련 없이 관람을 포기하자. 시스템에 융통성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라. 누가 봐도 온전히 늦은 자의 탓이다. 최소한의 교양이 남아 있다면 제발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

대부분의 클래식 연주회에서는 지연 입장 관객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약속을 지킨 관람객들의 권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 연극 공연도 지연 관객 입장을 최소화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