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天(동천)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1915~2000)
☞폐허의 전장, 포화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가운데 맑은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진다. 슈만(Schumann)의 피아노곡 트로이메라이(Traumerei, 꿈)다. 그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독일군 장교가 그 소리를 듣고 이끌리듯 철골만 앙상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낡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유대인 피아니스트를 발견한다. 독일군 장교는 그를 살려주고, 이후 여러 차례 위기에 처한 그를 구명한다. 실화가 바탕 된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이다.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낙오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다. 제10전투비행단 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김영환을 편대장으로 한 폭격기 4대는 폭탄과 로켓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김영환 대령은 명령을 거부했다. 전쟁이 끝난 뒤 명령불복종에 대한 추궁을 받았을 때 그는 말했다. 해인사가 국가보다 중요하진 않지만 북한공비들보다는 더 중요하다고.
동천(冬天)은 천하제일의 연애시(戀愛詩)다. 어느 누가 이토록 간결하면서 강렬하고 감성적인 시어를 구사할 수 있을까. 그건 미당만 가능한 일일 터. 가히 시성(詩聖)이라 할만하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천일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라는 표현은, 님에 대한 그리움이 그만큼 순수하고 지극하며 각별하다는 것. 여기에 비하면 연모(戀慕)나 사모(思慕)는 오히려 평범한 마음일 터. 님을 향한 그리움은 마침내 하늘에 닿는 천일기도의 수준으로 승화(昇華)되고, 그리하여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가치(價値)란 어떤 대상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關係性)에 매겨지는 값어치다. 가치를 알아본다는 것은 존재이유를 아는 것만큼이나 값지고 중요하다. 전쟁터 포화 속에서 슈만의 피아노연주곡을 향유(享有)한 독일군 장교, 폭격 명령을 거부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를 지켜낸 김영환 대령, 그리고 님을 향한 마음을 알아차린 매서운 새, 모두 가치를 알아본 최고의 존재들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