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근
박석근

정당정치는 대의제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또한 정당의 정체성(正體性)은 정당 존립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정체성 없거나 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정당은 존립근거를 상실한다.

그런데 최근 대선을 앞둔 정당들의 각축전을 보면 더 이상 이런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대중의 지지를 위해서라면 정체성의 전통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헷갈리는 정체성은 ‘민주당’과 ‘국민의 힘’을 가리지 않는다. ‘정의당’이 그나마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주의 이념의 틀에 갇힌 이 정당의 지지율은 3%가 한계다.

헷갈리는 정당의 정체성, 즉 정당과 대중의 분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갈등양상이 더 이상 과거를 답습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플랫폼노동의 등장, 젠더와 페미니즘, 기후위기, 성소수자 인권, 세대 간 갈등, 주택가격 폭등 등 미처 예상치 못한 사회갈등이 생겨났지만, 각 정당의 대응은 이를 따라잡지 못한다. 거기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정체성 또한 더 이상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사안에 따라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한다.

헷갈리는 정당의 정체성 문제는,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때 타협과 투쟁의 대상이 기성 기득권세력인지, 기업운영진인지, 정규직사원들인지, 정부인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무수한 갈등 가운데 어떤 갈등을 부각하고 이슈화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슈화 된 인물 중 누구를 비판하고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노선을 분명히 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한다. 대선을 코앞에 둔 정당들은 전쟁터에서 적을 식별조차 못한 채 아무데나 총을 쏘아대는 형국이다. 포퓰리즘의 등장 조건이 완벽히 갖추어진 셈이다. 포퓰리스트의 발언은 ‘사이다발언’으로 위장되고 국민은 알면서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다.

포퓰리즘은 예산의 선심성 공약으로 집약된다. 예산의 타당성, 필요성, 효과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국가부채비율이 100% 넘는다 해서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개인 부채는 기한 내 못 갚으면 파산이지만 국가부채는 이월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허언(虛言)들은 집권연장을 위해 주로 여당대표가 쏟아내지만 최근엔 야당도 정도차이만 있을 뿐 편승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정신이 번쩍 드는 외신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노르웨이 국방부는 의무 징집병들에게 제대하는 즉시 군에서 보급된 군수품을 다음 신병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반납하라고 명령했다. 인구 550만 명의 노르웨이는 2016년부터 남녀 공동 징병제를 도입했고, 매년 8천여 명의 신병이 입대해 병사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최대 19개월 간 복무한다. 요약하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워진 국가재정을 타개하기 위해 군복을 세탁하고 수선하여 재사용한다는 것. 잘 알다시피 노르웨이는 국민소득과 행복지수가 높은 선진국으로 선망의 대상이다.

헷갈리는 정당의 정체성 원인은 앞서 지적했듯 사회변화에 따라 새로이 생겨나는 갈등양상을 정당이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각 정당의 문제에 앞서 사회공동체가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사회건전성의 문제이다. 건강한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갈등의 조율기제(調律機制)가 작동한다. 한국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한국대중의 운명이 ‘가마솥 안에 든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법 없다. 개구리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가마솥 온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을 눈치 챘을 때, 때는 이미 늦는다. 한때 세계경제성장률 각각 2위와 5위였던 그리스와 아르헨티나가 그랬고, 석유부국 베네수엘라가 그랬다. 솜사탕 같은 눈이 녹으면 길거리에 온갖 쓰레기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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