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냐 정권연장이냐, 자유의 생활양식이냐 전체주의 생활양식이냐의 갈림길에서 다시 한번 자유란 무엇이냐를 생각하게 된다. ‘자유일보’일수록 더더욱 자유의 뜻을 되새겨야 할 것도 같다.
"나는 좌파가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요즘엔 자유의 철학보다는, 이른바 ‘중도실용주의’라는 걸 곧잘 내세운다. 여기엔 좀 문제가 있다. 중도나 실용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중도나 실용은 자유 체제의 한 요건일 순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유의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기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전체주의 극좌는 하나의 완결된 철학의 모습을 띠고 자유 체제를 파괴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선 자유인들 역시 하나의 투철한 철학 세계관 가치관 신념을 가지고 자유의 적과 싸워야 ‘제대로 된 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 신념 가치관 수준으로 승화된 자유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복잡한 이론의 모습으로 답할 생각은 없다. 이보다는 자유 체코의 여성 영웅 밀라다 호라스코바(Milada Horaskova)의 전인적(全人的) 자유 투혼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게 오히려 더 명확할 수 있다.
그녀는 체코 국회의원으로서 나치 1당 독재하에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다. 8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미군 진주로 석방됐다. 다시 국회로 진출해 여성 지위 향상에 헌신했다. 1948년에 체코가 적화되자 그녀는 이번엔 공산당 1당 독재에 저항했다. 공산당은 그녀를 포함한 12명의 양심수를 ‘국가 반역죄’ ‘서방측 첩자’로 몰아 기소했다. 취조 과정엔 잔인한 고문이 있었다. 1930년대 스탈린 소련의 ‘모스크바 재판(Moscow trial)’을 닮은 엉터리 재판 쇼 끝에 그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장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싸움에서 졌다. 그러나 명예를 지키며 간다.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다. 아무런 원한 없이 떠나겠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때 그녀에 대한 조작재판은 무효화 됐다. 그러나 1989년 민주화 후에야 그녀는 명예를 회복하고 최고 훈장을 받았다. 그녀의 고결한 투쟁과 희생은 2017년 영화화됐다. 한국에서도 넷플릭스로 볼 수 있다.
나치와 파시스트 전체주의 독재에 저항하고, 그 자유의 정신에 따라 볼세비키 전체주의 독재에도 저항한 그녀의 일생, 이게 바로 철학 신념 가치관 세계관 수준으로 승화된 자유의 모습 그 자체다. 나치 파시스트 전체주의에 저항한 그녀를 누가 감히 ‘퇴폐적 자유 방종’이라 헐뜯을 수 있을 것인가? 볼세비키 전체주의에 저항한 그녀를 누가 감히 ‘수구꼴통’이라 비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누가 감히 그녀를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틀딱 꼰대라고, 그래서 2030이 바라는 ’중도실용‘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멸공’이란 말을 썼다 해서 그것을 마녀사냥 하듯 몰아치는 공포가 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산당의 남조선 해방론, 보수패당 소멸론 등 ‘멸우(滅右)’는 왜 똑같은 논리로 비판하지 않는가? 그리고 볼세비키 극좌 전체주의 독재에 반대하면 불문곡직 다 ‘호전적 전쟁광’인가?
이번 대선에서도 좌·우 간에, 특히 우파 내부에 썩 유쾌하지 않은 마찰들이 목격되고 있다. 우파 일부의 이념적 혼매(昏昧), 신념과 열정 부재, 소아병적 권력투쟁, 비속한 여의도 정치, 확신에 찬 리더십 결여가 그것이다. 이런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전체주의를 막을 수 없다. 다양한 자유인들이 함께 승리하기 위해선 그래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당신은 무엇을 위해, 무엇에 반대해 싸워야 하는가?
19세기 말~20세기 말까지 있었던 현대사의 비극과 절망과 소망의 역사에 그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이 담겨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30년대 나치의 대두, 2차 세계대전, 동유럽 적화, 아시아 적화, 스탈린주의, 북한 신정(神政)체제, 소련 붕괴 때 출현한 모든 종류의 빅브라더(大兄)에 대한 위대한 자유인들의 위대한 투쟁에서 “자유란 무엇인가?”를 깨치고 내면화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처한 위기의 정체는 경제적인 위기에 앞서 바로 그 깨침도 내면화도 하지 못한 ‘철학의 빈곤’ ‘역사 인식의 빈곤’일 것이다. 자유를 세포까지 체화(體化)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패트릭 헨리처럼 “자유 아니면 죽음을!”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자유의 적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어본 적 없는 내 마음속의 ‘자유에 대한 무덤덤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