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분쟁은 시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리는 것처럼 세계 경제질서를 ‘각자도생’으로 내몰고 있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된 국가일수록 취약점이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과 통상 같은 경제 이슈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경제 안보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의 지나친 편중을 지렛대 삼아 외교적 보복 수단으로 삼거나 국내 경제에 위기를 촉발시키는 사례도 늘고 있는데, 한국·미국·일본 중에서 우리나라가 중간재는 물론 부품·소재의 대(對)중국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중간재의 대중 수입 의존도는 한국(27.3%), 일본(19.8%), 미국(8.1%) 순이었다. 2020년 기준 부품·소재의 대중 수입 의존도 역시 한국(29.3%), 일본(28.9%), 미국(12.9%) 순이다. 전경련은 기존 통계 중 중간재는 2019년, 나머지는 2020년 수치를 활용했다.
전경련은 한국, 일본, 중국 3개국이 경제 블록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중간재 및 부품·소재에 대한 대중 수입 의존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또 미중 무역분쟁이 심화하기 직전인 2017년과 지난해 1∼8월 전체 품목에 대한 대중 수입 의존도를 비교한 결과 우리나라는 3.8%포인트(p) 상승한 반면 일본은 0.1%p 오르는데 그쳤고, 미국은 오히려 4.2%p 줄었다. 미중 무역분쟁 발생 이후 우리나라의 대중 수입 의존도가 일본과 미국에 비해 큰 폭으로 늘었다는 의미다.
2019년 기준 중간재의 대중 수입 의존도는 우리나라가 2017년에 비해 0.7%p 상승한 반면 일본과 미국은 각각 0.2%p와 1.9%p 줄었다. 2020년 기준 부품·소재의 대중 수입 의존도는 2017년과 비교해 한국과 일본은 0.1%p와 0.9%p 각각 늘고, 미국은 5.7%p 줄었다.
특히 대용량 배터리, 반도체, 핵심 금속·소재, 의약품·의약원료품 등 4대 품목에 대한 대중 수입 의존도는 2020년 기준 우리나라가 모두 1위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의 대중 수입 의존도는 39.5%로 일본과 미국에 비해 2.2∼6.3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이 중국 현지공장에서 반도체 물량의 상당 부분을 전공정(웨이퍼 가공) 단계까지 생산한 뒤 한국으로 수입해 후공정(웨이퍼 절단·포장) 처리하기 때문이다.
또 환경 규제로 전기자동차 보급이 확대되고 신재생에너지 활성화로 에너지저장시스템(ESS) 수요가 증가하면서 우리나라의 배터리에 대한 대중 수입 의존도 역시 일본과 미국에 비해 1.4∼2.2배 높은 93.3%에 달했다.국내에서 전기자동차 판매가 증가하면서 국내 배터리 물량만으로는 수요를 맞추지 못해 중국 현지공장 생산분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의약품·의약원료품에 대한 우리나라의 대중 수입 의존도는 52.7%로 미국과 일본에 비해 1.5∼1.7배 높았고, 핵심 금속·소재 수입 의존도는 52.4%로 1.2∼1.3배 높았다.
김봉만 전경련 국제협력실장은 "올해 미국의 중간선거와 중국의 공산당대회를 앞두고 미중 갈등이 심화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민관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며 "주요 품목에 대해서는 중국 등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국내 생산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