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어 원화 실질 가치 하락 폭 세계 2위
술술 새는 달러...개인·국민연금 美주식투자 대이동
대미 투자 합의로 수출업체들의 더딘 환전도 원인

지난달 원화 실질 가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최근들어 투자자들의 위험회피 심리가 강해지는 가운데 미국 주식투자에 돈이 몰리면서 원·달러 환율 1400원대가 뉴노멀이 됐으며, 1500원대 진입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23일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실효환율(Real effective exchange rate) 지수는 올해 10월 말 기준 89.09(2020=100)로 한 달 전보다 1.44포인트(p) 하락했다.

이는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한 지난 3월 말의 89.29보다도 더 낮은 수준이다. 금융위기 때인 20098월 말(88.88) 이후 162개월래 최저치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던 199811월 말 외환위기 당시(86.63)와도 비슷하다.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외환위기 당시 최저 68.1, 금융위기 당시 최저 78.7까지 떨어졌다. 근래엔 2020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00선을 웃돌다가 이후 90 중반대를 맴돌았다.

실질실효환율은 한 나라의 화폐가 상대국 화폐보다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내는 환율이다. 수치가 100을 넘으면 고평가, 100보다 낮으면 저평가돼 있다고 간주한다. 지금 수준은 원화 실질 가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달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BIS 통계에 포함된 64개국 중 일본(70.41), 중국(87.94)에 이어 세 번째로 수치가 낮았다. 10월 한 달간 실질실효환율 하락 폭(-1.44p)은 뉴질랜드(-1.54p)에 이어 64개국 가운데 두 번째로 컸다. 한국만 보면 지난달 하락 폭은 지난 3(-1.66p) 이후 7개월래 가장 크다. 이달에도 원화가 다른 나라 통화보다 큰 폭으로 약세인 만큼 실질실효환율이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이달 들어 22일까지 원화 가치는 2.62% 떨어졌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확장 재정 기조로 약세를 나타낸 엔화(-1.56%)와 비교해도 하락률이 1%p 이상 크다. 박지훈 하나은행 자금시장본부 팀장은 "위험 회피 심리로 달러가 강세를 보인 데다, 내국인의 미국 주식 투자로 달러 매수세가 몰려 원화 약세가 유독 크게 나타나게 됐다"고 분석했다.

외환시장 안팎에서는 원·달러 환율 1500원대 진입 가능성도 나온다. 이미 환율은 지난 21일 주간 거래 장중 1476.0원까지 치솟아 미국 관세 인상과 미·중 무역 갈등 우려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49(1487.6)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박형준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예상보다 매파적인(통화 긴축 선호) 결정을 내릴 경우 달러 강세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일본 정부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에 따른 엔화 약세도 환율 상단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요인들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1500원 선도 방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정부 개입만으로 환율의 방향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고 전망했다. NH선물 리서치센터는 외환시장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원·달러 환율 전망치 상단을 1540원으로 제시했다.

하단도 1410원으로 1400원대를 뉴노멀로 봤다. 주식에 과도하게 쏠린 해외투자의 구조적 문제, 대미 투자 합의로 인한 수출업체들의 더딘 환전 수요가 모두 환율 추가 상승을 부추기는 재료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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