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궁금한 게 있다. 서울 종묘 옆 세운상가 지역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된 공간일까? 흥미로운 건 그 지역이 종로의 허리에서 퇴계로 쪽까지 남북 방향으로 1㎞ 넘게 걸터앉은 형국 때문이다. 서울 강북의 교통은 청계천-을지로-마른내길-퇴계로가 보여주듯 모두 동에서 서쪽으로 흐름을 유지하는데 왜 세운상가만 다른 것일까?

핵심은 세운상가는 본래 소개(疏開)도로였다는 점이다. 공습으로 인한 화재를 걱정해 작정하고 비워둔 공간이었다. 시작은 일제말 1945년 3월 10일 미군기의 도쿄 대공습이었다. 화들짝 놀란 조선총독부는 서울 중심부의 기존 건물을 몽땅 헐어 폭 50m 길이 1㎞의 초대형 빈 공간을 조성했다.

급하게 하다 보니 그 빈터는 비 오면 진흙탕이고, 평소엔 흙먼지 휘날렸다. 그러던 세운상가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신했다. 6·25가 터지며 월남민이 떼거리로 몰려와 무허가 판잣집을 그곳에 짓기 시작한 게 출발이다. 직후 사창가가 거길 파고들었다. 1950년 이후 1968년까지 세운상가 지역을 중심으로 종로 2~5가는 속칭 종삼 즉 사창굴의 대명사였다.

1966년 당시 갓 40세에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의 눈엔 그게 너무 끔찍했다. "어떻게 서울 도심에 저렇게 추잡한 공간이 방치됐단 말인가?" 대대적 정비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비작전이라는 이름의 대단위 철거작업을 진행했다. 거기에서 일하던 창녀 1368명, 포주 111명, 속칭 삐끼 170명이 모두 쫓겨났다는 게 정부의 공식 통계다.

이후 역사는 우리가 안다. 그 빈터에서 들어섰던 역사적인 건축물이 세운상가 건물군이었다. 당시로선 천지개벽이었다. 단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의 그 일대는 다시 도심 흉물로 변했다. 그 모습을 두고 최근 한 신문은 "처참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도시의 폐허"라고 표현했다. 시정을 담당하는 서울시장 오세훈의 심정은 오죽할까?

그는 4년 전 서울시의회 답변에서 "세운상가에 올라 종로2가, 동대문, 을지로 일대를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유를 우린 안다. 전임 서울시장 박원순 등 좌파가 고집하는 이른바 도시재생사업 탓이다. 그들은 난개발을 걱정하지만 결과적으로 노후 지역을 방치한다.

어쨌거나 여기서 얻을 확실한 교훈은 더 이상 정치 논리는 안된다는 점이다. 도시를 도시답게, 그게 세운상가가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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