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출신으로 김일, 유제두, 박지성이 있었다면 보성에는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최초로 소개한 서재필이 있었다. 서재필은 조선-대한제국 시기 정치인, 관료, 혁명가, 언론인, 상인, 의사, 작가, 교육인, 학자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고 1884년 김옥균과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후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일조했다.
서재필은 1864년 보성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한 조선의 문신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며, 미국에서는 해부학자이며, 영문으로 소설을 쓴 문학가이며, 중추원, 농상공부 고문이기도 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로도 활동했다. 서재필은 보성이 낸 천재였다. 보성에 가면 서재필 기념관이 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선교사로 들어온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타자기 회사의 사장인 언더우드 형이 그에게 재정지원을 했다.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그곳에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도록 주선하기도 했고, 관군에 쫓겨 다니는 동학교도들이 미국으로 도피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예수의 정신을 갖고 어디를 가든지 한인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을 섰고,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많은 공헌을 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 있는 외가 성주 이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 서광효와 이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6촌 형인 서광하의 양자로 가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그의 양어머니는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 김씨의 집안이었다. 이때 서재필은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 참판의 집에 갔다가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 사관학교에 가서 신식 군대 훈련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서 신식 군대 훈련소인 조련국의 사관장으로서 생도들을 양성한다.
1884년 갑신정변이 발발했을 때 자신이 데리고 있었던 생도들이 무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명성황후에 의한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게 된다. 즉 쿠데타의 실패였다. 쿠데타에 실패하자, 그의 가족은 처참하게 몰살된다.
아내는 음독으로 자살하고 두 살 된 외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는다. 음독한 어미의 젖을 빨다가 같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양가, 친가 가릴 것 없어 양아버지 서광하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고, 생부 서광효는 자결하였다.
생가 형제 중 맏형 서재춘은 감옥에 갇혔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생모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 이처럼 개혁과 혁명은 목숨을 담보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