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학 박사 / 전 기독언론인협회 대표
황규학

일찍이 호남지역에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염려했던 선교사가 있었다. 현재도 호남지역에는 고정간첩이 많고, 현재 논란이 되는 좌익의 김○○도 호남 출신으로 알려졌다.

1920년도에도 이동휘나 박헌영 같은 사람은 공산주의를 활용하여 한국을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이동휘는 볼셰비키가 목숨을 구원해 준 이후부터 볼셰비키에 심취하여 공산주의 당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공산주의를 등에 업고 항일 운동을 하였고 박헌영은 볼셰비키즘을 통하여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좌익의 바람이 1920년대부터 호남지역에 불고 있었다.

이러한 이념의 문제는 1920년대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 선교사들이 염려하는 바였다. 그중 한 명이 코잇 선교사이다.

코잇(1878-1932) 선교사는 루이빌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9년 데이비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남장로교회 선교사로서 프레스톤과 함께 순천지역을 담당하였다. 1913년 순천으로 이사하여 프레스톤과 함께 순천 스테이션을 설립하고 순천 매산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7년 동안 순천에 상주하면서 전남 동북구지역에서 사역했다. 그야말로 순천맨이다.

코잇 선교사는 선교사역을 하면서 "당시 반기독적이고 반서구적인 볼셰비키가 한국의 남쪽에서 확산되고 있었다"라고 경고하면서 "일본이 볼셰비키즘을 억제하고 있었다"라고 진단하여 이미 1920대부터 한반도 남쪽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음을 염려하였다(Rev. R.T.Coit, "The Situation in Korea", The Presbyterian Survey, 1926). 사회주의는 일본도 반대하였다.

순수 한인들이 조직해서 1921년에 만든 상해 고려 공산당은 1918년 4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창립한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였던 기독교인 이동휘가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조선, 중국, 만주, 일본 등지의 공산 단체 대표들을 소집하여 조직한 공산당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활동이 호남까지 확산되었다. 호남지역이 유달리 좌측으로 많이 간 이유 중의 하나도 1920년도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심어졌기 때문이다. 여순반란 사건도 호남에서 발생한 운동이다.

코잇 선교사는 1913년의 순천 사역 이외에도 1915년부터 1929년까지 구례와 광양지역을 순회하였고, 이 지역에 30여 개 교회들을 세웠다. 교회 부속 초등학교 8개와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유진벨 못지않게 호남에서 헌신한 선교사로서 한반도의 좌익 이념에 대해 제일 먼저 경고하고 염려한 선각자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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