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듣기’(Active Listening)의 대표적 장면은 무엇일까? 시험에 나올 예상 문제를 짚어주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귀를 들이대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할까? 가장 적극적으로 듣겠다는 태도는 어떻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물음이 이렇다고 해서 ‘듣는 행위’만으로만 좁혀서 생각하면, 이 물음의 답을 찾아가기는 어렵다.
그것은 ‘질문하기’다. 꼭 듣고야 말겠다는 태도가 구체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질문’이다. 그런데도, 질문은 어디까지나 말하는 행위이므로 듣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말하기와 듣기를 기계적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듣기는 말하기 없이는 애당초 생겨날 수 없고, 말하기는 듣기가 있어야 말하기가 된다. 이 자명한 이치를 우리는 놓친다. ‘질문’이야말로 말하기와 듣기의 상호교섭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는 대화적 학습의 장면이다.
질문 중에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질문’이 있다. 그런 내면의 질문들은 마음 안에서 꾸준히 자란다. 독서나 체험의 과정이 이런 질문들을 키운다. 내면의 질문을 안으로 쌓아가는 아이들은 어느 날 마침내 대단히 명시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내공 있는 교사는 ‘보이지 않는 질문’을 알아차린다. 내공 있는 모든 대화자들도 그러하다. 보이지 않는 질문에는 세 종류 차원이 있다.
첫째는 사물 현상에 던지는 질문이다. 박물관 전시장에서 어떤 유물에게 질문할 수 있다. 사막의 밤하늘 총총한 별에게 질문한다. 물론 이 질문은 언어화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질문을 품는다고 한다. 둘째는 텍스트에 던지는 질문이다. 명작을 읽고 작중 인물에게 질문할 수 있다. 그림이나 건물을 보고, 질문을 품을 수 있다. 셋째는 내가 나에게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내가 하고서도 그걸 질문이라고 의식하지 못한다. 인간적 성숙을 포함해 나의 정서나 도덕성 발달 등은 내 안에서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듯 의식의 수면 위로 잘 떠오르지 않는 질문들도 모두 ‘듣기의 의욕’을 안으로 지닌다. 인간은 모든 걸 꼭 귀로만 듣지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