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는 말했다. 정말 다행이지 않니? 우리가 가난해서" 뭐라고? 다들 부자 못 돼 눈 빨개진 세상에서 가난이 다행이라고? 이유가 있다. 주인공 모녀는 가난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임대주택에 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가 당첨된 임대주택은 재개발 아파트단지 내에 있는 임대 아파트였다. 방 두 개짜리 신축 브랜드 아파트. 타인의 생활감이 남아있지 않은 곳에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벽지에 찢어진 부분도, 누런 때도 없었다. 문지방이 깨져 있지도 않았다." 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 집에서 평생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은 자신의 바람을 현실화시킬 방법을 궁리한다. 청사진은 이렇다. "임대주택은 거주기간이 최대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어 계층이동을 신청하면 20년 동안 살 수 있었다. 그때쯤이면 엄마 나이가 65세를 넘기 때문에 고령자 계층으로 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다. 계약이 만료되기 몇 년 전부터 엄마 이름으로 임대주택을 신청하다가 당첨이 되면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거기서 엄마가 죽기 전까지 살다가, 엄마가 죽고 나면 내가 고령자 계층으로 임대주택을 신청한다."
오! 이런 방법도 가능하구나, 무릎을 치게 만든다. 모녀는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는 데도 성공한다. 소설은 그 액수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2024년의 주거급여 수급자 선정 기준은 중위소득의 48% 이하였다. 월 소득이 1인 가구는 106만 원, 2인 가구는 176만 원 이하여야 주거급여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다. 가난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주인공은 일 년 내내 중위소득의 43%인 97만 원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아르바이트를 한다. 모자라는 생활비는 주소만 이모 집으로 옮긴 엄마가 가사도우미로 벌어 충당한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속이 갑갑해진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기로 작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편히 읽힐 리 없다. 그래도 소설 속 주인공은 아직까지는 ‘덜’ 뻔뻔하다. 어쨌거나 일을 한다. 주변의 눈도 있고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살려고 할까. 어차피 생계급여가 나오는데 굳이 나가서 일을 하려 들까. 수치심은 잠시지만 육신의 안락은 한 달 내내다. 그리고 인간은 그다지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주인공의 타협 혹은 타락은 시간의 문제일 뿐 결론은 빤하다. 그런데 이게 소설에서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내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4인 가구 생계급여를 매월 200만 원 이상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의 안정적 소득기반 마련을 위해 기준중위소득을 6.51% 인상하겠다는데 이때 4인 가구 생계급여는 월 207만 원이 된다. 다 주는 건 아니다. 생계급여는 정부가 주기로 한 돈에서 해당 가구가 올린 소득을 빼고 준다.
편의점에서 하루 7시간 주 5일을 일할 경우 기본 시급에 주휴 수당을 더하면 월 201만 원 정도다. 한 달 뼈빠지게 일하고 6만 원 더 받을래 아님 집에서 놀면서 6만 원 덜 받을래, 물어보면 답이 어떻게 나올까.
복지의 본질은 자립을 돕는 안전망이다. 그러나 이번 정책은 근로 연계 방식이 아니라 소득 보전 중심의 배급 복지다. 한국이 남미 사회주의 국가처럼 배급 사회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재정 건전성 하락, 조세 부담 증가, 국가 경쟁력 약화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땀 흘려 일을 할 것인가, 국가가 주는 걸 받아먹으면서 놀고먹을 것인가, 자신의 양심과 싸우게 만들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 자립 의지가 없는 사람은 인간의 꼴을 한 가축일 뿐이다. 소설 제목은 ‘복 있는 자들’이다. 아마도 성경에서 따온 듯하다. 가난하고자 하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