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이 총 3500억달러(약 486조원)의 대미 투자 패키지 구체화 방안에 대한 이견으로 ‘결렬 고비’를 맞았다. 한·미 양국이 정면충돌하면서 ‘소방수’로 긴급 투입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빈손’으로 돌아왔고,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협의를 이어가기 위해 곧바로 투입됐지만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미 무역합의 취소로 미국의 대(對)한국 관세가 다시 25%로 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15일 정부에 따르면 여 본부장은 이날 한·미 관세 협상 후속 협의차 미국으로 출국했다. 김 장관이 지난 11∼14일 긴급 방미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대미 투자 의제를 놓고 협의했지만, 구체적 성과물을 내지 못한 직후다. 하지만 여 본부장에게 성과를 기대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다. 한·미는 지난 7월 30일 타결한 관세 협상에서 미국이 예고한 대한국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시행하는 등의 내용에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이행 방안에 관한 협의는 마무리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놓고 이달 실무 협의를 본격화했지만, 양국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앞서 일본에 ‘투자 백지수표’를 관철한 미국은 한국에도 같은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3500억달러 대부분을 지분투자(equity) 방식으로 하고 이를 단기간에 자국 내 특수목적법인(SPC)에 ‘입금’하라는 것이다. 투자 이익도 원금 회수 전까지 한국과 미국이 9 대 1 비율로 가져가되, 원금 회수 뒤에는 이 비율을 거꾸로 한국과 미국이 1 대 9로 하자는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투자 패키지 중 지분투자는 5% 정도로 하고 대부분을 직접 현금 이동이 없는 보증(credit guarantees)으로 하려던 우리 정부의 구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에 미국 구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한국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급속히 부상했다. 3500억달러는 한국 작년 국내총생산(GDP)의 20%, 2026년도 예산안(728조원)의 67%에 달한다. 미국이 요구하는 금액을 3년에 걸쳐 현금으로 넘겨준다고 가정하면 매해 국가 예산 약 20%를 미국에 고스란히 바쳐야 해 재정 운영이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또 국내 외환시장에서 대량의 달러 수요가 생겨나 원·달러 환율 급등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외화보유액은 4163억달러 수준이다. 한국이 현재 외환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는 달러 규모는 연간 200억~300억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국 측의 태도가 강경하다. 러트닉 장관을 앞세워 일본식 투자안을 받지 않으면 관세를 되돌리겠다며 공개적으로 위협 발언을 했다. 다만 외교가에서는 미국이 조선업 재건부터 반도체·이차전지 등 첨단산업에 이르기까지 제조업 부흥을 위해 한국을 절실히 필요로 해 트럼프 행정부 역시 한·미 관계 파탄에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 본부장의 방미로 당분간 한·미 줄다리기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자동차 관세 인하(25→15%) 시점이 지연되는 것은 물론 향후 협상 진전 과정에서 상호관세가 다시 25%로 인상될 가능성도 열어 놓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에 비해 한국은 선택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이 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