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승
이양승

경제를 돌리는 건 돈이 아니라 실은 신뢰다. 신뢰는 윤리가 아니라 자본이다. 바로 사회자본인 것이다. 선진국은 돈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신뢰 수준이 높은 나라다. 사회자본이 풍부한 나라다. 후진국은 사회자본이 빈약하다. 그래서 모든 계약이 불완전하다.

생각해보라. 부자나라 경제는 계약을 바탕으로 한다. 미시적 차원의 계약 불완전성은 거시적 차원의 경제 불확실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계약 완전성을 위한 충분조건이 바로 신뢰인 것이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도 국민과 계약관계에 있다. 국회에 위임된 권리는 국회의원들의 성실의무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들의 성실의무 이행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냥 양심에 맡겨질 뿐이다. 그게 계약의 불완전성이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비로소 그 불완전성의 폐해가 드러난다. 국회에서 차명 주식거래 장면이 포착됐다. 수사가 진행중인 마당에 그 윤리성을 논하는 건 새삼스럽다. 주식투자가 부동산투기보다 국가 경제에 더 이로울 수는 있다. 떳떳하게 벌어 당당하게 쓰는 게 자본주의다. 하지만 차명은 범죄다.

이 시점에 필요한 건 윗물 정화 메커니즘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일개미들을 괴롭히는 건 빈둥거림 속에 농간 부리는 배짱이들이다. 저신뢰 사회에선 그 농간이 처벌되지 않고 장려된다. 결국 족벌 자본주의로 수렴한다. 바로 한국이다. 이번 광복절 특사는 족벌 자본주의의 한 단면이다.

족벌 자본주의 용어는 1965년부터 1986년까지 마르코스 독재 하에 필리핀 경제가 어떻게 굴러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좋게 말하면, ‘인맥’ 경제로 요약된다. 사업 성공의 관건은 생산기술 또는 경영기술이 아니라 권력과의 접근성이었다. 권력과 비즈니스가 특혜와 금전적 호의를 주고 받는 식인데, 그 정도를 볼 때 정경유착이란 말은 너무 상투적이었다.

과거 한국은 대만과 더불어 유교 자본주의의 표상이었다. 세계 경제학계는 두 나라의 급속한 경제성장 배경에 유교 정신이 있다고 파악했다. 주입식일망정 교육열이었다. 반면 필리핀은 족벌 자본주의였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한국은 유교 자본주의가 족벌 자본주의로 대체되는 듯하다. 원시적이나마 한국에도 족벌 자본주의가 있었다. 구한말 탐관오리 족보에 의해서였다. 한국인이 자본주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일 수도 있다.

족벌 자본주의를 시장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면 이는 큰 오해다. 오히려 정반대다. 족벌 자본주의의 큰 특징은 서열이다. 서열이 편애와 특권으로 이어진다. 결과는 비리와 부패다. 권력자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이들만 편익을 챙긴다. 자원배분의 비효율화는 당연하다. 총생산성 약화는 덤이다. 시장 자본주의엔 정해진 서열이 없다. 관건은 시장 경쟁력이다. 노력과 높은 상관성을 보인다.

시장 자본주의의 기본 인자는 개인과 기업이다. 정부는 보조적 역할을 맡는다. 개인과 기업이 꿈 실현을 위해 적재적소에서 각각 열심히 노력한다. 기회는 균등하다. 다만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족벌 자본주의는 역량보다 서열을 중시, 특정 개인과 기업을 우선시한다. 기회가 균등치 못하다. 결과는 정부에 달렸다. 즉 정부가 시장 내 승자와 패자를 나누게 된다. 어떤 게 공정할까?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도 엉터리다. 시장 자본주의를 지지한다면 족벌 자본주의를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신분제도를 타파한 건 시장 자본주의다. 시장엔 신분이 없어야 한다. 족벌은 신분이다. 일개미들의 등허리를 밟고 올라선 배짱이 집단이다.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선 고신뢰 사회가 답이다. 즉 ‘신뢰 노믹스’다. 보유 자원을 활용해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주는 게 바로 신뢰 노믹스다. 보상이 노력을 찾아 가기에 일이 하고 싶은 그런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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