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세월이 흘러 동료와 친구들은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고 이제 ‘간첩’들만 남아 여생을 함께하고 있다." 작년 겨울, 90대 중반 H 수사관이 외손녀의 결혼식장을 찾은 필자를 보고 빙긋 웃었다. 4월 8일, H 수사관의 ‘그 간첩’중 한 명이었던 김신조 목사가 83세 나이로 별세했다.

1968년 1월,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했다.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북으로 도주, 김신조만 생포됐다. 북한은 ‘남한 내부 문제’로 일축하며 개입을 부정했다. 김신조는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같은 함경도 출신인 H 수사관이 수사팀에 투입됐다. 김신조는 전향했고,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H 수사관은 김신조와 함께 155마일 휴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수색대 장병들에게 북한의 침투 루트와 전술을 교육했다. H 수사관은 김신조를 친동기처럼 아꼈다. 김신조도 H 수사관을 부모처럼, 큰형님처럼 대했다. 김신조가 결혼할 때, 목사 안수받을 때, 부모석은 언제나 H 수사관 내외가 앉았다. H 수사관과 김신조와의 인연은 김신조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H 수사관은 실향민이다. 함흥에서 전문학교 재학 중 반소(反蘇) 데모에 가담하면서 1949년 5월 월남했다. 대한청년단에서 반공 활동을 이어 나가던 중 전쟁이 터지고, 1950년 10월 육군에 입대했다. 금화지구 734고지(일명 김일성 고지) 전투, 인제 현리 전투, 대북 침투 작전에 참가했다. 1953년 7월 종전 이후 육군 특무부대, 육군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를 거쳐 1989년 국가안전기획부에서 퇴직하고, 이후 1999년까지 국가정보원의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 H 수사관은 대한민국 대공의 역사이자 살아있는 증인이다.

H 수사관은 1980년대 후반 정보학교에서 필자에게 북한의 대남공작을 가르쳤던 교관이기도 하다. H 교관의 수업은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조는 교육생이 없었다.

다음은 H 교관에게서 들었던 수사 비화의 한 토막이다. H 교관이 특무대에 근무할 때였다. 간첩들은 명동의 본전다방과 서울역을 접선 장소로 많이 이용했다. 본전다방은 400개 좌석으로 1960년대 서울에서 가장 큰 음악다방이었고, 서울역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당시 서울의 핫플레이스였다. 수사관들이 검거한 간첩을 데리고 본전다방이나 서울역에 잠복해 있다 운이 좋으면 하루에 몇 명이라도 체포할 수 있었다. H 교관은 하루에 최고 7명까지 간첩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준비해 간 수갑이 모자라 새끼줄에 묶어 오기도 했다.

북한은 이후 간첩 교육 중 공작원들의 상호 접촉을 금지 시켰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시켰고, 이동할 때는 맑은 날에도 검은 우산을 써야 했다.

H 수사관은 2000년 이후 이산가족 상봉 붐이 일어날 때도 언감생심 상봉 신청은 꿈도 꾸지 못했다. 북의 가족이 대공수사관 가족이라는 것이 밝혀질 경우 받게 될 피해는 상상조차 싫었다. 부모님께 불효한 죄만도 뼈에 사무치는데 또다시 피붙이들에게 고초를 안겨 줄 순 없었다. 어쩌다 고향이 너무 그리워지는 날이면 H 수사관은 통일전망대를 올랐다. 고향 하늘, 고향 바다를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90대 중반 실향민이 할 수 있는 전부다.

80년대 후반 어느 가을, 교육생이었던 필자가 교관이었던 H 수사관의 자녀 혼사에 초대됐다. 사위가 안기부 직원이라고 했다. 교육을 마치고 실무부서에 배치됐는데, 필자의 사수가 어디서 본듯하다. H 수사관의 그 사위였다. 1996년, 전향 간첩이 성락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다고 했다. 전향 간첩을 담당하던 필자가 교회를 찾았다. 김신조 목사였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 이 글을 쓰면서 30년 전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사람의 인연이 진실로 기이하다.

***‘스파이세계’는 오늘로 3년여에 걸친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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