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스파이들의 인연 이야기를 쓰려는데 뜬금없이 피천득의 ‘인연’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노력으로 군대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낼 수도 있으며, 한 명의 스파이가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다.’ A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A는 어려서부터 스파이 영화에 심취했다. 1975년 23세의 나이에 KGB에 들어가고, 1985년 동독 드레스덴으로 파견을 나간다. 드레스덴은 컴퓨터 제조업체가 밀집한 곳으로, 산업 스파이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A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의 KGB 연락관으로 활동하면서, 서방의 기술 정보를 확보하는 경제 스파이로도 활동한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반정부 시위가 드레스덴으로 확산되자, 1990년 초반 A는 러시아로 복귀한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나자 A는 KGB를 사직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외교 및 경제 담당 보좌관이 된다.
B는 1974년 슈타지의 눈에 띄어 19세 어린 나이에 조직에 들어간다. 1981년 베를린 경제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고, 서독 은행권에 침투하기 위한 5년간의 전문교육을 받으며 경제 스파이로 활동했다. 1986년에는 무역사절단으로 위장해 서독 뒤셀도르프로 파견을 나간다. 이 지역은 독일과 유럽 전역에 가스를 공급하는 서독의 주요 에너지 공급업체들이 있는 곳이었다.
1989년 10월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 B는 드레스덴으로 복귀하지만, 1990년 2월 슈타지가 해체되면서 실직한다. 그리고 한 달 뒤, 서독에서의 활동 경력을 높이 평가한 드레스드너 은행이 B를 채용한다.
1991년 10월, 드레스덴에서의 인연을 믿고 B가 A를 찾아간다. 8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만났지만, B의 러시아어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그냥 독일어로 말해. 통역할 시간 없어." 독일어에 능통했던 A가 짜증을 냈다. B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회의는 성공적이었다.
드레스드너 은행은 1991년 12월 1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무실을 열었다. 러시아에 진출한 최초의 외국계 은행이었다. B는 드레스드너 은행의 러시아 자회사인 드레스드너 은행 ZAO의 회장이 됐다.
1993년, A의 부인이 생명을 위협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B는 A의 부인을 신속하게 독일로 이송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치료비도 드레스드너 은행이 부담했다.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에너지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갱단들과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A는 안전을 위해 두 딸을 독일로 보냈고, B는 그녀들의 법적 보호자가 되었다. A도 베를린에 갈 때마다 B의 아들이 운영하는 카페 데 아르티스트를 찾았다. A가 가면서 카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노르트 스트림 2(Nord Stream 2) 가스관 사업의 재개를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 B가 어른거린다. B는 노르트 스트림 AG의 최고 경영자였던 마티아스 와니그(Matthias Warnig)였다. 그렇다면 A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전(前) KGB 요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번 KGB는 영원한 KGB다." 1999년 12월 20일, 정보요원들의 공적을 기념하는 ‘체키스트의 날’, 푸틴이 KGB의 후신인 FSB 후배들에게 건넨 인사말이다. 푸틴과 와니그의 인연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피천득의 그립고 아쉬운 인연이 아닌, 상남자 스파이들의 차갑고도 뜨거운 인연이 그리워지는 대한민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