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가 매섭다. 독특한 제목은 제주 방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이다. 드라마는 1960년 제주부터 2050년 서울까지 70년을 묵묵히 달려온 부모세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작진은 ‘치열하게 살아온 그 시대 부모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제작 의도를 밝혔지만, 20~30대 젊은 세대는 물론 세계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며 성공적으로 항해 중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인생의 사계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도 태생 ‘요망진’ 애순이(아이유, 중년 문소리)와 어수룩한 ‘무쇠’ 총각 관식(박보검, 중년 박해준)이 사랑하고 살고 부딪히고 겪어내는 삶이다. 오랜만에 부모 자식이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 아버지 어머니의 ‘라떼 한판’ 그땐 이랬지 해설이 모처럼 화면과 붙는 드라마다. 연출은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의 김원석 감독, 각본은 ‘동백꽃 필 무렵’ 임상춘 작가가 썼다.
총 16부작인 이 드라마는 애순과 관식의 일생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4부작씩 4주에 걸쳐 공개된다. 지난 7일 봄 1막이 공개된 이후 애순과 관식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다. 드라마에 대한 화제성은 봄 여름을 넘어 가을 겨울로 이어질 것 같다.
실력파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
드라마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을 화면에 투사하는 주조연 배우 중 허투루 연기하는 이들이 없다. 비중이 크든 작든 각자 다 자기 몫을 해낸다.
애순 엄마 광례 역의 염혜란, 해녀 이모들 충수·양임, 경자 역의 차미경, 관식과 애순의 할머니를 연기한 김용림과 나문희, 그리고 오정세·엄지원 등 실력파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 차력쇼’가 볼 만하다.
김원석 감독은 "드라마에는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들의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입체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이들의 앙상블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했다"고 밝혔다. 그의 바람대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했다.
애순과 관식의 입맞춤 장면은 전북 고창의 한 농원에서 촬영했다. 당시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제작진이 사진 촬영을 못하게 막아 민폐 논란이 일었다. 그때 불편을 겪은 이들이 "그 드라마가 ‘폭싹 속았수다’인지 몰랐다", "지금 내 인생드라마다" 등의 글을 올리며 오히려 드라마에 사과하는 해프닝이 일고 있다.
철저한 고증 실력있는 미장센
애순과 관식의 파란만장 일대기를 담고 있는 만큼, 시간의 흐름을 작품에 잘 녹여내는 것이 중요했다. 제작진은 "1960년대부터 2025년까지, 의상부터 시대를 반영한 현실감 넘치는 공간까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그 중심에는 류성희 미술감독이 있다. 류 감독은 영화 ‘아가씨’로 2016년 한국 영화계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미술상(벌칸상)을 수상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외계+인’ 시리즈, ‘아가씨’ ‘국제시장’ ‘암살’ 등을 통해 한국 영화의 미장센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다.
류 감독의 손길을 거친 영화 속 공간들은 제주도의 옛 시장부터 유채꽃밭, 항구, 극장은 물론 복잡한 옛 서울까지 사실적으로 살아났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숨쉬던 공기까지 되살려낸 듯하다. 공간을 채우는 소품도 진지하다. 소표 전지 분유통, 지퍼식 장롱 등 디테일한 소품들을 섬세하게 배치해 놓고 있다.
제주로 혼저 옵서예
중국인들의 무분별한 침입으로 망가진 듯보였던 제주도가 드라마에서 아름다운 몫을 해낸다. 봄이면 제주의 파란 하늘과 바다, 샛노란 유채꽃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여름이 되면 별이 가득한 하늘로 바뀐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바다는 그러나 제주 바다가 아니다. 경북 안동에 세트장을 만들어 촬영한 뒤 CG로 구현했다. 실제 배도 배치하고, 풀 하나도 허투루 심은 게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최근 비하인드 스틸이 공개되면서 시청자들은 "이런 것도 CG였다니" 하고 놀라는 중이다.
제주 문화를 잘 반영한 점은 화제가 되고 있다. 알다시피 제주도는 모계 사회다. 1960년대 남녀 밥상을 따로 차리는 유교적 관습, 여성이 일하는 동안 남성은 한량처럼 사는 모습은 실제 제주 토박이들의 합격점을 받았다. 그 덕에 제주식 문화를 소개해주는 콘텐츠도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외국판 제목에는 어쨌든 ‘귤’
제주도 배경에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 외국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글로벌 OTT 플랫폼 콘텐츠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17일 기준 글로벌 5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을 비롯한 베트남·태국·대만 등 9개국에서 1위를 기록했다. 공개 초기에는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에서도 1위에 올랐다.
제목 번역도 인기에 한몫 했다. 각국 언어로 번역됐지만 격언, 의역을 활용해 뜻을 잘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어판에서는 ‘인생이 당신에게 귤을 준다면’이라는 의미를 지닌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로 번역됐다. 이는 미국 철학자 엘버트 허버드의 명언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살다가 레몬이 생기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를 변용한 표현으로 알려졌다.
태국어로는 ‘귤이 달지 않은 날에도 웃자’, 대만판 제목은 사자성어인 ‘고진감래’(苦盡甘來)에서 달 ‘감’(甘)을 귤 ‘감’(柑)으로 바꿔 제주도 상징인 귤을 떠올리게 했다.
생각할 ‘상’에 넉넉할 ‘춘’ 필명을 사용하는 임상춘 작가는 성별·나이·얼굴·본명 등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겨왔다. "작가로서 주변의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으로 머물고 싶다"라는 소신 때문이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가 20대 후반 독학으로 MBC 극본 공모전에 도전, 작가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단막극 ‘내 인생의 혹’으로 데뷔한 이후 9년 동안 4개 드라마를 집필해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무렵’에 이어 ‘폭싹 속았수다’까지 세 작품을 히트작 반열에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