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의 기행(奇行)은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달 27일 ‘광복회 창립 60주년 비전 선포식’에서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감사패를 주었다. "입법부 수장으로서 비상시국에 몸을 던져 선열들이 이룩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수호"한 공로란다. 우원식 의장이 비상시국에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수호했는지는 당최 감이 오지 않는다. 어쨌든 대통령이 구금된 상황이라 타이밍도 묘하다.
작년 광복절 기념행사를 앞두고 광복회는 색깔을 명확하게 밝혔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성립이 대한민국 건국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우기면서 자기들끼리 백범기념관에서 따로 모였다.
1900년생 정정화 여사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선생의 며느리다. 스물한 살에 상해 임시정부의 시아버지를 찾아 나섰고,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그녀는 여섯 번이나 은밀히 국내에 숨어들기도 한 여장부였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 목적’이라고들 하지만 실상은 궁핍한 임시정부의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6·25 때 남편이 납북되는 고통을 겪었고, 중국 시절 지인과의 인연이 부역죄로 이어져 옥살이까지 했다. 그녀의 인생은 연극으로 제작됐고, 그녀의 구술은 <장강일기>(長江日記)로 출판됐다.
백범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1940년대 임정 상황을 냉정하게 증언한다. "임시정부는 당시 국내와의 연결이 사실상 완전히 두절되어 있었으며, 만주나 중국 공산당 지배하의 한인 혁명세력과도 유대관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비참한 노릇은 중경의 한인사회조차도 이리 갈리고 저리 찢겨서 이렇다 할 중심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정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장강일기>, 206쪽)
임시정부를 승인한 유일한 정치집단은 1920년 7월의 볼셰비키 러시아였다(심헌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비에트러시아 외교관계의 형성과 독립외교 전개 그리고 비밀군사협정’, <재외한인연구> 제54호). 이른바 레닌 자금 40만 루블 소동이 그래서 등장한다. 1922년 1월 26일 발표된 임시정부 ‘포고 1호’는 문제의 레닌 자금을 이동휘와 김립이 횡령했다는 맹비난이었다. 이후 걸출한 지식인 김립의 몸에는 총알 12발이 박혔다.
광복회가 레닌주의자 홍범도의 육사 교정 흉상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등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엇나가는 기행을 일삼는 이유를 알 만도 하다.
